미국인들을 위해 미국학자가 쓴 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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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대립이 극심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외국인으로 브루스 커밍스(미 시카고대.58) 교수만큼 논쟁의 한복판에 서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의 시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 때문인데, 신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원제 KOREA'S PLACE IN THE SUN) 는 그 작업의 연장선이면서도 또 일부 자신의 진전된 관점을 첨가해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조감하고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커밍스는 두 가지 당혹스러움을 고백하고 있다. 먼저 『한국전쟁의 기원』을 놓고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남한이 일으켰다고 주장했다"고 말하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지도 않고, 주장한 적도 없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견해를 자신의 견해라며 일간지를 통해 보도가 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또 한 가지 더 당혹스러운 것은 1997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에서 김일성의 전쟁책임론을 지적한 부분 등을 놓고 "커밍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커밍스는 기본적으로 "전쟁에 대한 자신의 판단은 바뀐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는 이른바 그의 수정주의적 관점은 일관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커밍스는 "역사가가 복잡한 역사적 상황을 알고 있는 한, 수많은 요인으로 빚어지는 전쟁에 대해 어느 한쪽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전쟁의 내전적 역사성을 지적하는 커밍스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논란이 될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더욱이 최근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은 단순히 내전만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전의 요소도 종합적으로 끌어내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커밍스의 시각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신간은 여러 면에서 한국사를 보는 커밍스의 시각이 보다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인식을 지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신간은 커밍스가 미국의 대학생과 일반 독자에게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서술되었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번역본 제목처럼 한국 현대사에 초점이 맞춰져있고 자신이 현대사 전문가지만 커밍스는 근현대 한국사가 전개된 배경에 대해 1장에서 먼저 소개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민족의 기원으로 단군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하는 점이다. 단일민족이라는 한국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사를 한국인의 근원적 심성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하려는 그의 진지함은 평가할 만하다.

이 책은 탈이념의 시대와 민족의 개성을 강조하는 세계적 추세에 맞춰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이후 식민지를 거쳐 한국전쟁과 산업화로 이어진 과정을 전통과 단절되는 근대화로의 한 측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단절적 역사의 이면에 놓인 연속성에도 주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유교전통을 북한의 체제유지와 권력세습을 이해하는 데 적용하고 또 산업화된 남한에서 근대와 전통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도 눈을 떼지 않는다.

원서의 제목에서 한국을 '해 뜨는 나라'의 일원으로 묘사한 커밍스는 끝으로 "한국인들은 가족애와 교육의 미덕에 대해 놀라운 믿음을 지닌, 기백이 넘치고 근면하며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며 "반세기 동안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해왔으면서도 아직도 한국인들을 모르는 미국이라는 나라로부터 여태껏 받아온 대접보다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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