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교에도 지금쯤 가을이 머물고 있겠지

중앙일보

입력

작년 초여름, 장락분교라는 작은 학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장락분교는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어 들어가야 하는 가평군 설악면의 작은 시골학교입니다. 작은 분교였지만 교실에는 커다란 컴퓨터가 놓여져 있었고, 교실 뒷벽은 아이들이 쓴 글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네요. 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김은영 선생님의 동시집「김치를 싫어하는 아이들아」(창작과 비평사)에 너무나도 자세히 잘 나타나 있거든요. '교문 옆 느티나무 그늘엔 어미 개 한 마리 누워 있고', '선생님 사는 사택 앞 소꿉놀이 잔칫상 차려 있고' 엉성한 울타리를 넘어서 '아이들이 보고 싶어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는 산골 분교의 개들도 있더군요.

그 때 말붙이기가 무섭게 도망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김치를 싫어하는 아이들아』를 보고 있으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김은영 시인은 10년이 넘게 작은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동시집을 5부로 나누어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산골 마을 이야기도 함께 들려줍니다.

1부에는 시인과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의 생생한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편을 나누어 공을 차고 싶은데 동네 아이들이 없어 중학교 3학년과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한편이 되는 이야기를 담은 동시를 읽고 있으면 산골 아이들의 소박하고 환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과 나란히 우리 시골이 처한 현실이 아프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상처 받은 자연, 상처를 지닌 아이들

시인은 아이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자연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농약이 무서워 지천에 널려 있는 먹을 것들도 따 먹지 못하고, 첫 봄비 내리는 날 도시 사람들이 마구 잡아가는 개구리를 보고, 또 낯선 어른들이 포크레인으로 숲을 망가뜨려 가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

그 촉촉한 시선에서는 사라져 가는 자연의 이름만이라도 기억하고 싶은 시인의 가슴 아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책이나 영화 속에서가 아니라 바로 곁에서 무너져 가는 자연을 직접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아픔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 동시집을 읽다 보면 시골에 사는 아이들 중에 제법 많은 수의 아이들이 결손 가정에서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혼, 사별 등으로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아이들. 시인은 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정성껏, 아주 소중하게 시로 다듬어 놓았습니다. 읽고 있으면 콧등이 시큰해집니다.

받아쓴 시 - 엄마, 언제 와

형아야/ 형아는 엄마도 있는데/ 왜 울어//
울 엄마는/ 하늘나라 가서/ 이만-큼/ 이만-큼 잔 뒤에/ 성형 수술하고 온댔다//
엄마/ 나 오줌 안 쌀게/ 빨리 와라/ 응.

하지만 희망은 어린이들의 마음 속에

장락분교에는 눈이 오면 차가 다니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근처 작은 읍내에 살고 있는데 눈이 오는 날이면 집에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동네 어른들이랑 막걸리 한 잔을 하게 된다고 하지요. 집에 못 가도 잘 곳은 넉넉합니다.

동네 아무 집이나 선뜻 잠자리를 내어 주니까요. 시인은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면서 동네 어른들과도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절도 교회도 안 다니지만 세상 일 하나하나, 모든 먹을거리마다 미안해 하는 할머니의 기도를 듣기도 하고, 풀을 먹으면 고기에 풀 비린내가 난다고 싱그러운 풀 한 입 못 뜯어먹는 소 이야기, 집 나간 엄마 대신 엄마 노릇하는 울보 희준이네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시인은 산골마을에 대한 애정을 새록새록 키워가겠지요.

이 책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시골 아저씨처럼 수수하게 생긴 시인이 아이들이 쓴 글을 보여주며 쉼 없이 아이들 자랑을 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교실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아이들의 손길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던 선생님. 바로 그런 선생님이었기에 이런 동시집을 낼 수 있었겠지요. 시인을 만나면서, 또 이 책을 읽으면서 동네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 학교, 시냇물처럼 맑은 아이들을 묵묵히 지켜주고 있는 그 시인에게 우리나라 동시 문학의 희망을 걸어보게 됩니다. (고정원/리브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