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 韓·美공조와 민족공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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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는 참으로 '민족'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민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민족대학' '민족신문' '민족예술'…. 그 무슨 낱말에도 그 앞에 '민족'이라는 수식어만 붙으면 어딘가 모르게 무게가 실린 것 같고 누구도 감히 비판해서는 안되는 성스러운 개념처럼 느껴진다.

최근에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한.미 공조' 대신에 '민족 공조'를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여기서도 우리 국민의 상당수는 '민족 공조'라는 표현에 심리적으로 압도당하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을 것 같다.

터놓고 말하자면 평소에 북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들까지도 '민족 공조'를 하지 않고 다른 나라와 공조한다는 데 대해서는 무엇인가 마음 속으로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민족 공조'가 '한.미 공조'에 우선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명제다. 미국이 우리에게 아무리 중요하고 고마운 맹방이라고 할지라도 미국은 미국이고 한국은 한국이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이 최우선이고 한국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

*** 정통성 없는 북측 파트너

그런데 문제는 지금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공조가 과연 진정한 민족 공조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북한 통치자들은 북한 주민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한 주민들이 선택하지도 않았고, 북한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북한 주민들을 북한이라는 감옥 안에 감금해 놓고 온갖 억압과 착취를 거듭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정도로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놓은 장본인들이다.

그러고도 자신들은 프랑스 포도주에서부터 독일제 벤츠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값비싼 세계의 명품들을 사들여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과의 공조를 민족 공조라고 한다면 그것은 '민족 공조'라는 말의 뜻을 전적으로 왜곡한 데서 나온 오해다.

북한 체제는 공산주의적 정통성도 없는 세습독재 체제다. 그런 체제가 민족 공조를 위한 우리의 파트너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동족을 탄압하고 있는 세력을 상대로 경제협력도 하고 협상도 하고 대화도 하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북한 통치자와 같은 '악'의 세력과는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순수한 도덕적 견지에서 보면 악의 세력과는 정상적인 관계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협력과 화해를 말하는 것은 도덕성의 문제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정치와 외교는 순 도덕적 차원에만 머물 수는 없다.

도덕적 판단은 행동의 동기에 기초하지만 정치적 판단은 행동의 결과를 중시한다. 그러니까 독재자를 상대함으로써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면 '악의 사자'와도 대화를 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지금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북한은 이번에 핵확산 금지조약을 탈퇴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미국과의 협상은 상당히 강력하게 제시해 왔다. 어떻게 보면 북한의 주 의도는 미국과의 쌍무협상을 끌어내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핵 프로그램을 재개하는 북한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만일 북핵 문제를 현 단계에서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음 단계에서는 충돌의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 뻔하다. 그런 가운데 북측이 대미협상을 제안해 왔다.

*** 북핵, 현단계서 해결해야

만일 깊은 사려 없이 북한의 제안을 묵살해 버린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문제해결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이 문제는 한국 정부도 적극 나서야 한다. 대외적으로 공개토론회를 벌이자는 뜻이 아니고 내부적으로 조용히, 그러나 효과적인 맹방 간의 대화를 통해 미국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 수 있는 기회를 적극 포착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한.미 공조'다.

◇약력=미국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전 주미대사, 현 사회과학원장, 서울 국제포럼 회장,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