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금융선진국은 언제 되나

중앙일보

입력

지난주 미국에서 연쇄테러 사건이 터지기 전에 피랍된 항공사의 주가가 떨어지리라는 데 걸어둔 옵션거래가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뉴욕 금융 중심지가 폭파될 것을 미리 안 테러리스트와 주변 인물들이 두 항공사의 주가가 급락할 것을 내다보고 돈을 벌기 위해 한 소행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사실이라면 테러범들은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을 폭파했을 뿐만 아니라 머니 게임에서도 이겨 큰돈을 챙긴 셈이다.

*** 테러범 주변 옵션거래說

주식.채권.주가지수 등을 장래의 일정 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권리를 매매하는 옵션거래는 이미 보편화해 있다. 특히 개별 종목 옵션이 인기다.

주가가 오를 것으로 예상하면 콜옵션(살 수 있는 권리)을 사들인다.

A종목을 주당 5만원에 살 수 있는 콜옵션을 매입했는데, 한달 뒤 6만원으로 오르면 이익이 난다. 콜옵션을 이용해 6만원짜리를 5만원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주가가 떨어질 것 같으면 풋옵션(팔 수 있는 권리)을 사들인다. B종목을 주당 5만원에 팔 수 있는 권리를 매수한 뒤 주가가 4만원으로 떨어지면 이익을 볼 수 있다. 4만원 짜리 주식을 5만원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외신 보도를 보면 테러범 주변에선 풋옵션을 이용해 연쇄테러 이후 항공사의 주가가 떨어지자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테러범들의 재테크 치고는 가위 수준급이자 엽기적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종목 옵션거래를 할 수 없다. 여러 개의 주식을 하나로 묶어 산출한 주가지수를 매매하는 옵션거래는 1997년 7월부터 시작됐는데, 왜 개별 종목 옵션거래는 안될까.

우리가 그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증권거래소는 이미 1년 전에 개별 종목의 옵션상품 개발을 마쳤다. 그런데 부산에 있는 한국선물거래소에 모든 파생상품의 매매권을 2003년 말까지 넘기기로 한 약속이 문제가 됐다.

종목 옵션거래를 증권거래소에 허용하면 부산지역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이유였다. 선물거래소는 업체들이 금융 중심지인 서울에 세우자고 했는데, 97년 대통령선거 공약에 따라 부산에 건설된 이력이 있다.

우리 정부가 이같은 정치논리에 휘둘려 우왕좌왕하는 사이 지난달 30일 홍콩이 삼성전자.SK텔레콤.국민은행.한국통신.포항제철 등 5대 기업의 옵션상품을 10월 4일부터 상장한다고 발표했다.

이들 '빅5' 의 시가총액은 46%로 한국 주식의 절반 정도가 홍콩에서 요리될 수도 있게 된다. 한국을 찾으려던 외국인 투자자금이 홍콩으로 기수를 돌릴 수도 있다.

'우리가 안 하는데 누가 하랴' 며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생각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다급한 정부는 18일 증권거래소가 종목 옵션거래를 내년 1월부터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그래도 홍콩보다 석달이나 늦다. 그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번영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뒤 나흘을 쉰 미국 뉴욕증시는 17일 다시 문을 열면서 우려와 달리 하락률 7%로 선방했다.

전격적인 금리인하와 기업의 자발적인 자사주 매입 결의가 일반 투자자의 충격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금리인하를 발표한 3시간 뒤 유럽중앙은행이 화답했다. 같은날 캐나다와 스위스.스웨덴 중앙은행도 보조를 맞췄다.

*** 한국 증시 세계 최대 하락

한국은 하루 뒤인 19일 허겁지겁 뒤좇아 콜금리를 낮췄다.

한국 증시는 미국 연쇄테러 이튿날 오전장을 닫은 뒤 별 조치 없이 오후에 열었다가 12%라는 세계 최대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같은날 일본은 가격제한폭을 절반으로 축소해 6.6% 하락으로 막았다.

시장은 캠페인이나 명령.약속으로 정돈하기 어렵다.

수많은 외국 투자자와 외화자금이 들락거리고 세계 증시가 닮은꼴로 움직이는 판에 '주식 안팔기 운동' 으로 상황을 바꾸기는 어렵다. 합리적으로 제도를 바꾸고, 거기에 맞춰 기업과 투자자가 움직이고, 그 시장의 압력을 받아 경제주체가 변하도록 해야 한다.

양재찬 경제부장 ja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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