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내 몸은 내가 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이영직
변호사

지금 장년쯤 되는 사람들은 부모님들이 한 번쯤 “내 몸은 내가 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 찾아뵌 부모님의 얼굴색이 안 좋다거나, 식사를 제대로 못하시거나, 거동에 어딘가 불편함이 있어 병원에 가기를 권했을 때 연로한 부모님들은 으레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자식들이 부담해야 할 돈 걱정 때문에, 컴퓨터 등 온갖 ‘신식 장비’들로 무장한 현대의 최첨단 의료 장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지만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스스로의 ‘감’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 역시 살면서 스스로 내 몸 상태에 대해 약간의 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느끼곤 한다. 가끔씩 건강진단을 받게 될 때 스스로 그 결과를 어느 정도는 맞힐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몸 상태가 좋다고 느낄 때 검진을 받으면 ‘양호’라는 판정이 나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런저런 수치가 안 좋게 나오곤 한다. 컴퓨터와 온갖 시험 장비들로 이루어진, ‘과학적인 의학’이 판정하기 전에 이러한 지식에 전혀 문외한이지만 어느 정도는 내 몸이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럴 때는 나도 고승(高僧)이나 무협지에 나오는 강호의 고수 반열에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떠난, 완전히 객관적인 상태에서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제 어느 정도 통용되고 있는 상식이라고 할 것이다. 과학 역시 사람이 하는 것이며, 따라서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떤 용도로 보는가에 따라 그 결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연과학이나 수학의 역사에 관한 현란한 지식을 굳이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학과 기술로 무장된 삶을 살면서 우리는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의 주권을 그 누구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 스스로 몸 상태가 괜찮다고 느껴도 병원에 가서 컴퓨터와 온갖 수치로 무장한 시험 결과를 대신할 수 없고, 구름과 별의 상태를 보고 내일의 일기를 예측하기보다는 기상대의 예보를 믿을 수밖에 없고, 나름대로 확신을 가진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포털을 통해 확인을 하기 전에는 일단 망설이게 되는 것 등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엄마가 느끼는 배 속의 태아에 관한 ‘감’은 초음파 진단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고, ‘버릇없는’ 아이에 대해 할아버지나 선생님의 훈계권은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법조계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분쟁이나 다툼이 있을 때 이를 상식과 합리라는 무기로 해결하는 경향은 차츰 사라지면서 ‘법률 전문가’가 해결사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내 밥그릇이 조금이라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자위해야 할까.

 점점 제도화되고, 전문화된, 그렇지만 부분적인 지식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담당하게 되면서 우리가 통합적으로 느끼고, 판단하는 영역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이성과 지식이 발달하면 우리들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높은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믿어 왔으나 오히려 발달된 그들이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힐링이 대세라고 한다. 생존경쟁에 쫓기고, 파편화된 인간관계에 소외감을 느끼고, 불안한 미래로 인해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을 힐링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힐링 역시 어느 면으로 보면 역시 우리들의 상식적이고 직관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과학과 지식의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특별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대상으로 삼아 우리들의 마음을 힐링한다고 하니 말이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언젠가는 냉혹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더라도, 그저 잠시나마 내 몸과 마음을 전문가가 아닌 나 자신에게 맡기고 싶다. 결국 인간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잠시라도 자신을 놓을 수 없는, 피곤한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다.

이영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