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판 훈련기 무료 AS 해줬더니 한국을 믿더라”

중앙일보

입력 2011.04.1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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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경 KAI 사장이 인도네시아 고등훈련기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된 다음 날인 13일 인터뷰에서 수주전의 뒷얘기를 하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고등훈련기 T-50 모형이다. 변선구 기자
1초에 340m를 가는 소리보다 1.5배 더 빠른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은 24만 개의 부품으로 이뤄져 있다. 자동차보다 10배 많다. 그런데 가격은 중형 승용차 쏘나타 1000대 값과 맞먹는다. 초음속 항공기의 부가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이런 첨단기술의 결정체를 우리가 만들고 수출까지 하게 됐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 12일 자국 고등훈련기 교체 사업의 우선협상대상 기종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T-50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세계 6번째로 한국이 초음속 항공기 수출국의 대열에 진입한 것이다. T-50 설계와 생산, 해외 수주까지의 쾌거를 이뤄낸 김홍경 KAI 사장을 만나 수주전에 얽힌 뒷얘기와 한국 항공산업의 현주소, 미래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을 축하한다. 처음부터 자신이 있었나.
“경쟁 상대가 있는 게임인데 쉬운 일이 어디 있겠나. 러시아는 냉전 시절 미국과 함께 세계 각국에 무기를 공급하던 방위산업 대국이다. 인도네시아도 오래전부터 수호이 전투기 등 러시아제 무기를 써 온 나라여서 러시아와는 두터운 인맥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 틈을 뚫고 들어가야 하니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체코는 물량 공세로 나왔다. 인도네시아는 16대를 사려고 하는데 32대를 주겠다고 했다. 게다가 지난해 6월, 1차 기종 평가 결과(쇼트리스트)에서 우리는 러시아에 뒤진 2위였다. 이번에 우리가 거둔 성과는 그런 불리한 형세를 뒤집은 역전극이다.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이다. 최종 계약까지는 아직 절차가 남아있지만 이변이 없는 한 인도네시아 수출은 우리 몫이다.”

T-50 인도네시아 수출길 연 김홍경 KAI 사장

-역전의 비책이 있었나.
“우리는 성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세계 유일의 초음속 훈련기인 데다 T-50으로 훈련한 조종사는 차세대 전투기 모든 기종을 조종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3만1000시간 무사고 비행을 기록한 안전성도 월등했다. 그에 비하면 경쟁 기종인 러시아의 야크(YAK)는 아직 개발 단계에 있어 미검증 상태였다. 게다가 최근엔 야크 2대가 훈련비행 도중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물건이 좋다고 저절로 팔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인도네시아 정부를 설득하는 게 문제였다. .

지난해 6월 쇼트리스트에서 뒤졌을 때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착안한 게 인도네시아가 사용 중인 기본훈련기 KT-1이다(KT-1은 KAI가 개발한 프로펠러 추진형 경비행기다). 2000년대 우리가 17대를 팔았는데 막상 현지에 가보니 가동률이 떨어져 있는 걸 목격했다. 아무 소리 않고 돌아온 뒤 부품, 장비와 함께 정비 기술자들을 보내 고장 난 걸 다 고쳐줘 날 수 있게 했다. 조종석 덮개인 캐노피도 두 개를 무료로 갖다 줬다. 인도네시아 공군 조종사들이 깜짝 놀랐다. 요구도 안 한 걸 우리가 자발적으로 해 줬기 때문이다. 일종의 고객감동 서비스였다. 그 뒤 한국 비행기를 사면 후속지원을 철저히 해 준다는 소문이 좍 퍼졌다고 한다. 그게 계기가 돼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그 뒤 11월 2차 평가에서 우리가 1위로 올라섰다. 마케팅 비결을 다 얘기할 수 없으니 여기까지만 해 두자.”

-가격을 낮춰 준 것 아닌가.
“이것 하나는 분명히 해두자. KAI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다. 손해 나는 장사 안 한다. 만약 인도네시아에 싸게 줬다고 치자. 그럼 다른 나라에도 같은 값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다. 덤핑으로 따낸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속이 탄다. 가격을 속 시원히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첫 수출이니 최대한 가격을 낮추려고 노력했을 텐데.
“이번에 사업을 따내야 다음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부품 메이커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을 내라고 했다. 부품업체들도 론칭 마켓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좋은 가격으로 제공해 줬다. 그런 가격을 종합해서 총액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합리적인 가격을 내는 것과 손해보면서 파는 것은 다르지 않나.”

-정부 지원은 없었나.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인도네시아에 가서 유도요노 대통령과 정상회담하면서 T-50 판매에 직접 나섰다. 인도네시아가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우리나라의 경험을 많이 배우고 싶다는 분위기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지난 2월 인도네시아 고위 대표단이 경제협력을 위해 방한했는데 그때 국가정보원 직원의 절도 미수 사건이 있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이 될 수도 있지 않았나.
“인도네시아 정부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 단 한마디도 없었다. 사실 어느 나라나 그런 식의 정보활동을 다 하는 것 아닌가.”

-인도네시아에 앞서 싱가포르와 UAE 수주전에서는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되지 못했는데.
“일부 언론에서 ‘3수’ 끝에 붙었다고 표현했던데 동의하기 어렵다. 아직 UAE는 끝난 게 아니다. 2009년 2월 25일 우선협상대상자 발표에서 이탈리아 업체에 밀려 차순위가 됐다. 그럴 경우 현지 사무소를 철수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우리는 아직 남아 있다.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월 아이덱스 방위산업 전시회에 갔었는데 여전히 관심이 많더라. 싱가포르는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상대방 컨소시엄의 리더가 싱가포르 업체고 회장이 전 총리 부인이었다. 그래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로 인해 우리 직원들 사이에서도 침체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번에 만회했다. 전 직원에게 보낸 e-메일에서 ‘드디어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고 썼다.”

-이번 인도네시아 성공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수출길도 열린 것인가.
“현재 이스라엘 쪽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폴란드도 곧 제안요구서를 낼 것이다. 미국은 시장이 제일 크다. 현재 사용 중인 훈련기를 개량할 것인지, 아니면 기종을 교체할지 검토 중인 단계다. 교체 쪽으로 결론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전 세계 수요의 30%가량인 1000대를 수출하는 게 목표다.”

-T-50에 직접 타 본 적 있나.
“내가 민간인으로서는 초음속 비행기를 처음 타 본 사람이다. 2008년 사장 취임한 뒤 김태영 당시 합참의장을 만났더니 자기도 외국 군인들 만날 때 T-50 선전을 열심히 한다며 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 길로 돌아와서 직원들에게 나도 타 보겠다고 했더니 공군참모총장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만든 제품이라도 마음대로 못 타는 게 군용기다. 그러고 나서 신체검사까지 통과한 뒤 한 시간 정도 조종석 뒷자리에 탔다. 초음속을 도저히 느낄 수 없었다. 표지물이 있어야 속도를 인식할 텐데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에 올라가니 빠른지 느린지를 모르겠더라. 조종사가 지금 음속 돌파한다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자동차 페달을 밟을 때처럼 덜컥한 게 전부였다.”

-우리 항공산업의 경쟁력을 어떻게 보나.
“비행기는 설계, 생산, 시험, 평가의 단계를 거치는데 각 과정마다 구조역학, 전기공학 등 20여 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 있어야 하고 또 팀워크가 잘 짜여져야 한다. 우리 직원 3000명 가운데 절반이 엔지니어인데 이런 회사가 전 세계에 별로 없다. 이게 우리의 경쟁력이다. 기술력은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파치 헬기 동체도 우리가 만들어 납품한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런 우수 인력이 이어지지 않는다. 지금 고교 졸업자 가운데 이공계 진학 자체가 30%밖에 안 된다. 이런 현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애비에이션 캠프(항공캠프)’를 만들어 전국의 수학·과학 교사와 학생들을 초청하고 있다. 초·중·고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원리 중에 비행기 제작에 채택되는 원리가 56가지인데 이를 직접 보여 주고 실험해 보는 것이다. 가령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은 베르누이의 정리에서 출발하는데 이를 현장에서 보여줘 학생들이 과학에 흥미를 느끼도록 하자는 것이다.”

-KAI에서는 군용기만 만드나.
“그렇지 않다. 매출 가운데 민수 비중이 40%다. 하지만 돈은 민수 쪽이 더 번다. 지난해 이익 1200억원 가운데 65%가 민수다. 방위산업은 국가안보에 필요한 것이고 구매자금은 국민 세금이라 비싸게 받을 수가 없으니 돈은 민수에서 벌어야 한다. 보잉이든 에어버스든 어떤 비행기를 타더라도 우리가 만든 제품이 거기에 들어 있다. 앞으로 보잉 787 드림라이너 날개가 복합재로 바뀌는데 우리가 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