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해도 일본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나 브랜드는 ‘K’를 떼야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K’를 붙여야 관심을 받는 ‘K-프리미엄’이 생겨났다. 과장이 아니다. 2024년 현재, 도쿄의 트렌드 발신지로 꼽히는 시부야에서는 연일 한국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가 열리고, 명품 거리로 불리는 아오야마에 문 연 한국 브랜드의 매장 앞에는 매번 긴 줄이 늘어선다. 이세탄·마루이 등 일본 주요 유통 업체의 상품기획팀에는 도쿄에 상륙하지 않은 한국의 ‘핫’ 브랜드를 찾는데 여념이 없다. 분명 우리보다 패션에서, 소비재에서 ‘한 수 위’였던 일본의 변화다. 자국 브랜드 사랑이 유난히 뜨거워 ‘내수 철옹성’으로까지 불렸던 일본이 한국 브랜드에 무장 해제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시부야 팝업에 하루 3000명 몰렸다, 도쿄의 ‘오픈런’ 풍경
② 한국에는 있는데, 일본에는 없는 것
③ 50억-〉1800억, 이 브랜드가 새로 쓰는 K-패션 성공 방정식
온도가 달라졌다.
K, 도쿄에 상륙하다②
소비재로 퍼지는 ‘4차 한류’
특히 한국 패션 브랜드의 위상 변화는 국내에서 먼저 감지됐다. 최근 몇 년간 서울 한남동과 성수동의 패션 매장 앞에 여행 가방을 든 외국인들이 줄을 서는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됐다. 외국인 중에서도 일본인 매출 비중이 특히 높다. 한 캐주얼 브랜드는 주말 3일간 진행한 백화점 팝업 매장에서 전체 5억원의 매출 중 50%를 일본인 매출로 채웠다.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또 다른 캐주얼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에서는 한때 일본인 매출이 전체 월매출의 90%에 육박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 소비자들의 이 같은 호응은 자연스레 브랜드의 일본 진출로 이어지고 있다. 코오롱 FnC의 잡화 브랜드 ‘아카이브 앱크’는 지난 4월 첫 해외 진출국으로 일본을 낙점, 공식 온라인 몰을 열었다. “성수동 쇼룸을 찾은 일본인 쇼핑객들이 일본 매장 오픈을 문의하는 경우가 많아진 게 계기가 됐다”는 게 브랜드 관계자의 설명이다.
명품과 SPA 사이
한국 브랜드는 일본 패션 시장에서 비어있는 두 가지 지점을 공략한다. 우선은 가격대다. 지난달부터 일본 파르코와 더현대 글로벌 팝업스토어를 진행하는 박동용 현대백화점 상품본부 책임은 “백화점 중심의 명품과 중가 이하의 패스트패션이 장악한 일본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는 디자이너 감성에 적당한 품질, 합리적인 가격으로 중가 이상 고가 이하 시장을 공략한다”고 말했다. 박화목 마르디메크르디 대표도 “(일본 시장에는) 적당한 가격대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브랜드가 적다는 느낌”이라며 “무신사나·29CM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극심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한국 브랜드라면 승산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감각은 세계 수준, 가격은 적당
브랜드를 풀어내는 방식도 일본인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간다. 히라마츠 파르코 점장은 “서울 성수동에서 지상을 텅 비워 놓은 탬버린즈 매장을 보고 파리 퐁피두센터를 떠올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 브랜드는 브랜드의 강점과 매력을 철저하게 표현하고 단번에 집중시키는 힘이 굉장하다”고 말했다. 이세탄의 한국 프로젝트 담당자인 미야지 사호씨도 “단순히 옷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테리어·식물·디스플레이 등 모든 것을 세심하게 전개해 그 브랜드 옷을 입은 사람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세계관 구축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SNS로 취향 대통합
무엇보다 SNS로 취향의 대통합이 시작됐다. 한국의 길거리에서 유행하고 SNS에서 통하는 패션 콘텐트가 일본으로 동남아시아로, 미국으로 쉽게 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확산력이 높은 K-팝 콘텐트가 촉매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최근 해외에서 흥행하는 한국 브랜드는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나 무신사·29CM 등 온라인 플랫폼을 타고 성장한 작은 브랜드가 중심이다. ‘마뗑킴’ ‘마르디 메크르디’ ‘오픈와이와이’ ‘미스치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SNS를 활용해 브랜드 세계관을 확실히 구축하고 소통에 능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SNS 비주얼을 통해 단번에 폭발적으로 확산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K’ 떼고도 생존해야, 완성도는 과제
다만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한 과제도 분명하다. 중간 가격대에 개성 있는 브랜딩과 디자인으로 소구하지만 완성도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히라마츠 파르코 점장은 “(한국 브랜드가) 역시 본질이나 퀄리티(품질)는 아직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며 “더 위를 목표로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평가했다. 허철 무신사 글로벌 본부장은 “한국 브랜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지금, 이들의 충성도를 사려면 지금보다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가격을 지나치게 올리지 않는 등의 영민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K-브랜드라서 좋은 게 아니라 K를 떼고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자체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숙제가 남는다. 현지 통역=한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