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원수 갚은 문랑·효랑 자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소송 열에 아홉은 묘지 소송
선산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박수하의 원수를 갚은 박문랑·효랑 자매의 행적을 그린 『박효랑전』.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수하 선산에 박경여 조부 묘 써
소송 중 발언 문제 역고소로 옥사
큰딸 문랑, 파묘 후 다투다 숨지자
작은딸, 여론전 끝 ‘정려’ 결정 받아
유교 상장례 정착, 묘지 소송 급증
선산 수호 목숨 걸었던 시대 풍경
소송 중 발언 문제 역고소로 옥사
큰딸 문랑, 파묘 후 다투다 숨지자
작은딸, 여론전 끝 ‘정려’ 결정 받아
유교 상장례 정착, 묘지 소송 급증
선산 수호 목숨 걸었던 시대 풍경
이로부터 미혼의 두 딸 박문랑(朴文娘)과 박효랑(朴孝娘)이 등장하며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회자된 사건이 되었다. 우선 박수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큰딸 문랑이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문랑은 아버지의 옥사가 박경여의 늑장(勒葬, 권세를 빌어 남의 땅에 강제로 장사 지내는 일) 때문이라고 보고 문제가 된 그 집 조부 묘를 파헤치기로 한다. 그녀는 일가친척 및 노복들과 함께 묘산(墓山)으로 올라가 파묘하여 관을 꺼내 시신을 불태워버린다. 사굴(私掘)을 단행한 것이다. 사굴은 범죄인 데다 더구나 시신 훼손은 살인법이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금장(禁葬) 지역에 투장(偸葬, 몰래 매장하는 행위)을 했을지언정 그 묘를 파내는 것은 묘를 쓴 당사자 외에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었다. 사실 이런 법 규정 때문에 도둑 매장을 해 놓고 파묘 명령이 내려져도 팔짱을 끼고 세월아 네월아 하여 산송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산송 자료. 묘지 소송인 산송은 단순히 묘지를 둘러싼 이권 다툼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와 위상을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조선시대 소송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왜들 이렇게 묘지에 목숨을 걸었던 것일까. 조선의 건국과 함께 유교의 상장례가 국법으로 정해지자 불교식 화장(火葬)을 매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국 100년이 지나도록 완전하지는 못했다. 성종 5년(1474)에는 “존장의 유언을 따라 시체를 화장한 자는 장(杖) 100대에 처한다”는 『대명률』의 조항을 상기시키면서 매장을 고급문화로 여기는 분위기다. 이즈음에 성립된 『경국대전』에는 분묘의 한계를 정하고 경작과 방목을 금지하는 법령이 등재되었다. 분묘가 차지하는 공간은 관료 1품(영의정)이 사면(四面) 각 90보에 한정되고, 2품 이하는 10보씩 감하여 5품이 50보에 한정되었다. 6품 이하 및 생원·진사, 유음자제(有蔭子弟, 음직을 받는 자제)들은 40보를 금장 구역으로 정했다. 100보가 약 70m이므로 40보라면 사면 각 28m가 된다. 국법이 정한 한계 외에 조선후기에는 좌청룡 우백호의 용호수호(龍虎守護)가 인정되면서 불법적인 광점(廣占)이 만연해지며 묘지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형국이었다. 조선후기 사대부가라면 산송에 휘말리지 않은 집안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야기시켰다.
영남 남인 들고 일어나 억울함 호소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에 있는 박문랑·효랑 자매의 효각. [사진 이숙인]
효각 안의 비. [사진 이숙인]
자매 행적 그린 전기 『박효랑전』도 나와
영조 2년, 조정 회의에서 박문랑의 정려가 결정된다. 시골 부녀에 불과한 박문랑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애통으로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린 용맹은 장부(丈夫)도 해내지 못할 일이라고 한다. 임금은 “박문랑이 칼을 끼고 말을 달리어 군중 속으로 돌진하는 늠름한 모습이 마치 실상을 보는 듯하다”라고 하였다(영조 2년 12월 20일).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박문랑과 아버지와 언니의 억울함을 여론화하여 명예를 회복시킨 효랑의 행적이 전기로 꾸려졌다. 박수하의 친족이 저술한 『박효랑전』이 그것이다.
묘지 소송으로 시작되어 두 자매의 효행을 기리는 이야기로 마무리된 이 사건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는 유교적 상장례의 확산과 부계 친속 의식의 강화로 조상의 묘를 한 곳에 모시는 종산(宗山)이 형성되면서 산송이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묘지 수호에 목숨을 건 사람들, 조상의 묘에 가문의 위상과 명예를 걸었던 사람들은 저 생이 편해야 이생도 편하다는 사생관과 무덤을 조상의 혼백(魂魄)이 깃든 영원한 안식처로 본 생멸관이 빚어낸 역사의 한 장면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장례 문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