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수중 발굴 조사를 위해 잠수사가 입수하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하잠.(잠수하라는 의미)”
“(치지직) 해저 도착.”
둔탁한 통신음과 함께 바다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바지선 위 잠수 통제실도 호응했다. 잠수사 마스크에 달린 영상장비를 통해 희뿌연 바다 속 부유물들이 통제실 컴퓨터 화면을 실시간으로 채웠다. 바지선에서 바라보는 해수면에선 잠수사의 공기 호흡을 알리는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주변에 늘어선 파란 깃발들이 이 일대가 ‘통제구역’임을 알렸다.
26일 오전 전라북도 군산시 인근 선유도 해역 수중유산 발굴조사 현장. 바지선에서 남쪽 20m 떨어진 지역의 수심 5m 구간을 탐색하던 김태연 잠수사가 입수한 지 10여분 만에 무언가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해저 60㎝가량 파내려간 곳에서 거무스름한 물체가 발견된 것이다.
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수중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인 국립해양유산연구소 관계자들. 물 속에 들어간 잠수사가 보내오는 영상 통신 정보를 바지선 잠수통제실에서 체크하는 모습이다. 사진 국가유산청
선사시대부터 해상활동…고려청자 등 쏟아진 곳
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진행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수중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목재. 약 1.5m 길이로 침몰한 선박의 부속구로 추정된다. 사진 국가유산청
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진행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수중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선박 일부로 추정되는 목재 조각을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3차 발굴 200번째 수중 탐색…“선박 묻혔을 가능성”
잠수 직전 착용하는 특수 조끼엔 도합 20kg 가량의 무게추가 달려 있어 물 속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만약을 대비해 별도 착용하는 공기통(10kg)까지 총 30kg 이상의 장비를 차게 되지만 정작 물속에선 부력 탓에 무게를 느낄 수 없다고 한다. 연구소 측은 “무게추 개수는 조사 상황에 따라 바뀌는데 물 속 움직임이 가장 편해지도록 늘리기도 줄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진행된 수중 발굴 조사에서 김태연 잠수사가 입수에 앞서 마스크와 공기통 등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강혜란 기자
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진행된 수중 발굴 조사에 참여한 잠수사의 장비가 놓여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관계자들이 수중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물 속의 잠수사가 슬러지 펌프로 뽑아올리는 물길이 여과시설을 통과하면서 유물을 걸러내는 장면이다. 사진 국가유산청
전체 조사대상 약 25만㎡…“3%도 못 팠다”
통상적으로 잠수 작업은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진행된다. 2인 1조로 들어가 회차당 대략 80~90분 바다 속을 누빈다. 조류와 수압 등으로 인한 부담을 고려해 잠수사당 입수 횟수는 1일 2회로 제한한다. 바다 물때를 감안해 열흘 작업 후 닷새 쉬고 다시 반복하는 식이다. “유물이 자주 출수되는 걸로 봐서 선박이 묻혀있을 가능성이 큰데, 전문 장비와 잠수사가 확충돼 작업을 서둘렀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김태연씨가 말했다.
군산 지역은 바다와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비안도(2004), 십이동파도(2005), 야미도(2008) 등에서 해저유적 발굴조사가 이뤄져 왔다. 이 가운데 선유도는 고려시대에는 중국과 무역의 기항지 역할을 했고, 조선시대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되는 등 서해 항로의 중요한 기점으로 꼽혔다. 고려청자가 다수 출토된 것 역시 인근의 강진, 부안 등 가마에서 생산된 것을 개경 등으로 운송하던 활동이 활발했다는 의미다. 이 밖에 청동숟가락, 철제솥과 같은 선상 생활유물과 목제닻, 노(櫓), 키(舵), 닻돌 등이 출토된 것도 고선박이 침몰해 있을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이규훈 과장은 “선박 매몰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그와 별개로 수시로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이 일대의 해상활동을 규명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수중유산을 통해 우리 역사의 다채로운 측면이 조명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26일 전라북도 군산의 선유도 해역 수중유산 발굴 조사 현장의 바지선에서 앞서 발굴된 주요 유물들이 언론 취재를 위해 공개되고 있다. 강혜란 기자
고군산군도와 선유도
고군산군도는 고려시대 만경현(萬頃縣)에 속해 있었으며 이 중 선유도(仙遊島)는 군산도라 불리면서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중요한 기항지 역할을 하였다. 1123년(인종 원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군산도에는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客館)으로 쓰인 군산정(群山亭)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관청 건물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바다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추정되는 오룡묘(五龍廟)와 불교 사원인 자복사(資福寺), 그리고 숭산행궁(崧山行宮) 등이 있었고 민가도 1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장한 군사를 실은 6척의 배가 송나라 사신의 배를 호위하고, 군산도 안에도 1백여 명이나 되는 군사가 도열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군산도는 서해안의 핵심 군사기지의 역할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323년(충숙왕 10)에 회원현(會原縣)의 조운선이 고군산군도의 선유도 근방에서 왜구에 의해 약탈당하고, 이들이 다시 남하하다가 추자군도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려 말 극심해진 왜구의 출몰로 그 기능이 마비된 군산도에는 1397년(태조 6) 수군 만호영(萬戶營)이 설치되었다. 이후 세종 때 옥구현 진포로 옮겨감에 따라 군산이란 지명도 옮겨져 진포가 군산포진(群山浦鎭)이 되고 기존의 군산도에는 옛 ‘고(古)’자를 붙여 고군산(古群山)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상 국가유산청 설명자료)
『고려사(高麗史)』에는 1323년(충숙왕 10)에 회원현(會原縣)의 조운선이 고군산군도의 선유도 근방에서 왜구에 의해 약탈당하고, 이들이 다시 남하하다가 추자군도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려 말 극심해진 왜구의 출몰로 그 기능이 마비된 군산도에는 1397년(태조 6) 수군 만호영(萬戶營)이 설치되었다. 이후 세종 때 옥구현 진포로 옮겨감에 따라 군산이란 지명도 옮겨져 진포가 군산포진(群山浦鎭)이 되고 기존의 군산도에는 옛 ‘고(古)’자를 붙여 고군산(古群山)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상 국가유산청 설명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