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화창한 제주에서 모차르트 공연을 마치고 왔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숨 쉬고 들으라는 말이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설명을 이어가던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까지 꺼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인터뷰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 각자의 자리가 있다"
빠르고 능률 중요한 시대에 이야기하는 성찰의 중요성
- 그럴 땐 어떻게 가르치시나요. 듣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 아닐까요?
- “타고 나는 게 너무 비중이 크긴 해요. 그 다음에는 훈련이죠. 무엇보다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게 가장 중요해요.”
- 어떤 독립의 과정을 겪으셨나요.
- “나는 (15세에) 미국으로 가기 전에는 음악이 뭔지 피아노가 뭔지 모르고 그냥 친 거예요. 한마디로 엉터리지. 어려운 곡을 쳤다 해서 최연소다, 최초다 했는데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이제 공부 시작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경험이 너무 안 좋아 오히려 피아노하고 거리를 두게 되더라고. 음악은 끌리는데 악기가 두려운 거라.”
- 10세에 그리그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하셨고, 신동 칭호를 들으셨죠. 그런데 어떻게 엉터리라 느끼셨어요?
-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소리를 즐기고 뭔가 만들고 한 게 아니니까. 사람들이 칭찬하면 거짓말 같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내가 어떻게 삶을 살고 음악을 어떻게 할 건지 답이 안 나와. 앞이 캄캄했죠.”
- 어떻게 하셨나요.
- “중요한 건 음악이 좋아서 떠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음악에 관한 건 뭐든지 했어. 노래 반주, 실내악, 오페라 반주, 보컬 코칭의 반주, 발레 연습 아르바이트, 브로드웨이의 뮤지컬과 연극 반주. 하여튼 다 했어요. 줄리아드 음악원에는 또 좋은 클래스가 많아서 콘트라베이스, 첼로 이런 반주도 다 하고.”
- 그러다 답을 찾으셨나요?
- “그러던 어느날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잘났든 못났든 우리는 다 다르고, 내 자리도 어디엔가 있겠다 싶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피아노겠다. 이제 좀 집중해보자 했죠. 스물 셋, 스물 넷쯤 됐을 때일 거야.”
- 그때 미국에서 콩쿠르도 입상하고, 화려한 독주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거죠?
- “근데 내 질문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어요. 훌륭한 연주를 듣고, 선생님의 좋은 충고를 받아도 그게 다 남의 아이디어잖아. 내 음악이 뭔지 찾아야겠다 싶었지. 그래서 유럽으로 온 거고. 운좋게 프랑스 어떤 분이 집에 와 있으라 했어요. 거기에서 한동안 외부하고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렸어요. 낡은 피아노에서 악보만 가지고 완전히 혼자 공부를 시작했지. 그리고 매일 같이 걸어 다녔어. 주위를 다 보면서 걸었지.”
- 혼자가 되는 시간이 필요한 거군요.
- “내가 지금 꼭 해야하는 게 뭔가를 깊이 고민하게 됐지. 혼자 생각하면서부터 알게 되더라고. 라벨ㆍ무소륵스키 전곡을 녹음한 게 선생님들이 아이디어를 준 게 아니거든요. 그 음악들이 그렇게 매혹적일 수 없어. 내가 좋았고, 사람들도 여기 빠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했던 거예요. 선생님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자기가 보고 느끼고 찾아가야돼.”
-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죠. 요새처럼 속도가 중요한 시대에 어렵기도 하고요.
- “빨리 공부하고 완성하는 건 그냥 능률이지. 본질을 제대로 알 수는 없어. 좋아하는 걸 발견했을 때 희열, 악보에 대한 열정과 사랑 이런 걸 느낄 수가 없잖아.”
- 그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백건우가 있는 걸까요.
- "그건 틀림없어요. 틀림없어. 일부러 그런건 아니고, 또 시대 때문일 수도 있지. 내가 굉장히 내성적이었거든요. 근데 계속 내성적일 수는 없었지. 어느날 프란츠 리스트가 들리기 시작하고 (1982년 파리에서 여섯번)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내성적인 게 바깥으로 나오는 게 느껴졌어요. 그 작곡가를 연주하려면 내성적이서는 안되니까. 긴 여정 중의 한 순간이었죠."
- 언제나 모든 버전의 악보, 문헌을 구해서 철저히 연구하시죠.
- “연주 여행을 갈 때마다 지역 도서관, 국회 도서관, 옛 악보 서점 같은 데를 다 돌아다녀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도 버전이 다섯 개가 있는 걸 아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돌아다니며 찾고, 버전마다 다 찾는 거지. 어떤 때는 엉뚱하게 미국 시골의 음악 학원에서 악보를 찾아. 드뷔시가 피아노 연주법에 대해 쓴 악보를 찾고 너무 기뻤어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궁금하고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자연히 그렇게 하게 돼. 시간은 들지.”
- 요새는 지루하고 시간 걸리는 일을 못 견디죠.
- “연주를 해보면 신기해요.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곡을 그래도 훌륭하다고 여겨 연주하면, 그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해. 메시앙, 부조니, 그리고 슈만의 ‘유령 변주곡’, 모차르트 ‘프렐류드와 푸가’…. 진실된 음악이라서 그래요. 그 작품이 우리에게 정말 주는 게 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있다는 믿음으로 계속 가는 거죠. 그러다보면 조금씩 한겹 두겹 벗겨지기 시작해.”
- 그러면 본질에 도달하게 되나요?
- “완전히 이해하고 끝까지 봤다고 하는 사람 있으면 그건 잘못된 길로 간 거야. 미켈란젤로도 다비드상을 미완성이라고 했다잖아요. 그게 우리 길이야.”
- 그 과정은 즐거우신가요?
- “괴롭기도 하고, 남이 상상 못할 희열도 느끼고. 나만이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세계도 발견하고. 음악은 무한한 힘이 있거든. 그런데 요즘엔 음악가가 너무 직업이 돼버린 것 같긴 해요.”
- 요즘 젊은 예술가들도 천천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 과정을 갈 수 있을까요?
- “있겠죠. 힘들겠지만. 근데 봐요. 예술을 하다보면 얼마든지 쉽게 살 수 있잖아. 근데 진짜 예술가들은 다 어렵게 살았어. 그 사람들이 그 삶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쉬운 삶은 자기 게 아닌 거지. 나도 절망할 때도 많았고, 큰 돈도 벌 수 있었고, 쉽게 갈 수도 있었지. 그래도 이게 내 삶인 것 같아. 그 이상도 안 바라고.”
- 광고 촬영 제의도 많이 들어왔죠?
- “별 광고가 다 들어왔어. 진희 엄마(고 윤정희 배우)만 찍자, 같이 찍자, 아기랑 찍자…. 근데 하나도 안 했어. 나는 나름대로 참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해. 근데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던 삶을 돈 주고 바꾸고 싶지 않아요. 이 사람들은 과정은 생각 안 하고 이름만 필요한 거잖아.”
- 느리고 힘들게 걸어오신 과정을 지키고 싶으신 거죠.
- “자기한테 주어진 것을 할 때 행복해. 누굴 본따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등수 없는 콩쿠르도 만들고 싶어. 우리가 도와줄 사람들만 뽑아서 도와주는 걸 하고 싶어요.”
백건우는 젊은 음악가들이 음악에 실컷 빠져서 살고, 자신의 고독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언젠가 마련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도 천천히 곱씹으며 선택한 작곡가, 모차르트를 연주한다. 68년 피아니스트의 길 중 최초의 모차르트 녹음인 그는 "내 머릿속에서 제일 많이 떠도는 단어는 언제나 '데뷔'"라고 했다. 백건우의 모차르트 무대는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을 거쳐 15일 인천, 21일 함안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