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거장 윤형근과 청주
김인혜 미술사가
배석했던 통역자가 ‘심심하다’는 말을 저드에게 설명하느라 고전했다. ‘심심하다’는 시간적 의미로 말하면 ‘지루하다’는 뜻이다. 똑같은 시간이라도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면, 우린 심심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아무런 목적도 없고, 규정된 틀도 없이 ‘심심한’ 순간이 있어야 예술적 창의가 일어난다. 예술은 특별하게 힘을 줘서 잘난 체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일상에 심심하게 스며들어 듬직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윤형근은 생각했다.
“예술은 심심한 것” 특유의 지론
잘난 체 않는 듬직한 미감 추구
죽은 지 수백 년 된 전나무에 충격
“나도, 그림도 대수롭지 않아” 각성
대학 졸업에 10년, 쉰에 활동 시작
묵은 발효음식 같은 작품 쏟아내
잘난 체 않는 듬직한 미감 추구
죽은 지 수백 년 된 전나무에 충격
“나도, 그림도 대수롭지 않아” 각성
대학 졸업에 10년, 쉰에 활동 시작
묵은 발효음식 같은 작품 쏟아내
또한, ‘심심하다’를 맛으로 설명하면, 마치 우리의 전통 제사 음식 같은 것이 된다. 간을 하긴 하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려 담백한 음식 말이다. 그런 음식을 담아 올린 우리의 백자 제기 같은 것도 참 심심하다. 허연 무채색으로 얼핏 존재감이 없어 보이지만, 자꾸 봐도 질리지 않는 심심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 심심한 미학이야말로 윤형근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지점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환기 장녀 김영숙과 결혼
1977~78년작 ‘청다색’. 개인소장. 윤형근은 이 작품을 ‘천지문(天地門)’이라고도 했다. 하늘을 뜻하는 파란색과 땅을 뜻하는 갈색을 섞은 검정에 가까운 색으로 문(門)을 그려서다. 핵심은 오히려 가운데 여백의 공간, 즉 문 너머의 세계다. [사진 윤성렬, PKM 갤러리]
윤형근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찾아서,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356번지를 가 봤다. 그는 파평 윤씨 장손 집안의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파평 윤씨는 16대에 걸쳐 미원면 어암리에서 살아왔는데, 윤형근의 부친 대에 미원리로 나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홍송(紅松)을 가져와 공들여 지은 한옥이었지만, 현재는 양옥집이 들어서 있었다. 다만, 남서쪽에서 볕을 담뿍 받는 집의 배치는 옛 그대로인 듯 보였다. 주변의 야트막한 산들과 집 옆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평온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이 실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윤형근의 생가 바로 뒤편으로 현재 ‘미동산 수목원’이 자리하고 있다.
윤형근의 부인은 화가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이었는데, 처음 결혼해서 시댁에 와보고, ‘내가 참 시집을 잘 왔구나’ 생각했단다. 도무지 부잣집이라고는 할 수 없는 평범한 시골집이었지만, 옆 개울에 다슬기가 많이 잡혔던 데다, 산들이 새까맣게 보일 만큼 나무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부인이 다슬기국을 좋아해서, 윤형근이 새벽마다 나가서 다슬기를 잔뜩 잡아 오곤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현재도 청주의 특산 별미 중 하나가 다슬기국이다.
풍림정사 지은 박문호의 4대손
1986~87년작 ‘다색’. 개인소장. 땅에서 솟아오른 기둥 같은 형상이다. [사진 윤성렬, PKM 갤러리]
1988~89년작 ‘다색’. 개인소장. 오랜 세월 흙이 덮이고 덮여 만들어진 무덤 같은 형상이다. 삶과 죽음, 시간에 대해 일깨운다. [사진 윤성렬, PKM 갤러리]
민병산과 청주 으능나무
미원면 생가 앞에서 찍은 1940년대 가족사진.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윤형근. [사진 윤성렬, PKM 갤러리]
보은 풍림정사. [사진 국가유산청]
청주의 또 다른 걸물인 시인이자 출판인, 침술가였던 신동문(1927~1993)과 더불어, 민병산과 윤형근은 삼총사였다. 6·25 전쟁 때 이래저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모두 고향 청주에 내려와 있던 시절, 이들은 현재의 충북문화관 맞은편에 있던 윤형근의 집을 아지트 삼아 늘 모여 지냈다. 이 집은 윤형근의 조부가 지은 작은 별채였는데, 어느 날 꽃을 유난히 좋아했던 민병산이 트럭 한가득 꽃을 실어와 그 집 마당에 심더란다. 자기 집에 있던 꽃을 왜 이리 옮겨 심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매일 이곳에서 지내니, 꽃도 이리로 옮겨 와 매일 보려고 한다”라고 답했다. 곧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청주의 많은 학생이 이 집에 숨어들어와 지냈다.
윤형근의 장구한 시간 개념
청주시 중앙 공원의 은행나무. 고려 공양왕 때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목은 이색을 홍수로부터 구해주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사진 국가유산청]
그런 장구한 시간 개념이 윤형근의 삶과 작품에 녹아있다. 그는 느릿하게 살았다. 이유야 어떻든 대학을 졸업하는 데만 10년 걸렸고, 작품 제작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도 그의 나이 거의 50에 가까워서였다. 그러나 그는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오래 묵혀 제대로 맛을 내는 발효 음식 같은 작품을 쏟아냈다. 서까래처럼 거무칙칙하고, 돌처럼 우툴두툴한데, 자연스럽고 듬직하게 우뚝 선 그런 작품이었다. 윤형근의 시간은 참 느릿하게 흘렀지만, 그래서 심심한 맛을 표현하는 법을 제대로 익혔다.
김인혜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