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듯 확성기로 전파된 정보로 인해 최근 우상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김정은의 권위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며 3일 중앙일보에 이같이 말했다. 영국 주재 북한 공사 출신인 태영호 전 국민의힘 의원도 "북한에서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이등병의 편지'를 흥얼거릴 정도로 확성기로 흘러나오는 한국 노래와 뉴스의 영향은 대단하다"고 전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남측으로 '오물 풍선'을 내려보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정부의 확성기 재개 방침 발표 5시간 만에 사실상 한발 물러선 배경에는 전방을 지키는 젊은 '북한판 MZ세대' 군인들의 사상적 이탈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됐다고 탈북 고위 당국자들은 분석했다.
젊은 軍 '사상 침투' 두려움
대북 확성기가 북한을 압도할 수 있는 우리 군의 대표적인 '비대칭 전력'이라는 점을 북한도 잘 알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류 전 대사대리는 "북한은 대남 확성기가 있다고 해도 장비의 성능이나 전력 수급 현실로 볼 때 사실상 맞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대북전단은 오물 풍선으로 맞섰지만, 확성기까지 켜지면 손쓸 방도가 없기 때문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1963년 박정희 정부 때 시작돼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남북 군사합의를 통해 중단됐다. 그러나 이후 정부는 천안함 폭침(2010), 목함지뢰 사건(2015), 4차 핵실험(2016) 등 북한의 중대 도발 시 대북 확성기를 재설치하거나 방송을 재개했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 당시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이후 확성기는 모두 철거돼 현재까지 방송이 중단됐다.
"전역 후 '이등병의 편지' 부를 정도"
태영호 전 의원은 이날 중앙일보에 "접경지역 군인들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새카만 밤에 굶주린 배를 붙잡고 근무를 서던 중 트로트 등 한국 노래가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면 그렇게 귀에 잘 박힌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오물 풍선 도발 등을 다시 감행하면 반드시 확성기를 다시 켜겠다고 예측 가능한 경고를 해둬야 한다"며 "확성기가 남북 대결을 격화하는 장치가 아니라 북한의 도발을 자제하도록 해 충돌 확산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 복무의 낙…후방에도 전파"
1970년대 북한 측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했던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전방지역 군인들은 확성기 방송을 듣는 게 군 복무의 낙"이라며 "본인만 듣는 게 아니라 후방에 이를 전달하며 이들이 직접 일종의 '안테나', '중계탑'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거 사상 교육이 투철할 때도 확성기 방송은 잘 먹혔는데, 최근 문화적으로 남측에 훨씬 경도된 '장마당 세대'에 대한 체제 이완 효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을 북한이 얼마나 아파하는지는 앞선 남북 간 고위급 회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2015년 8월 북한이 남측 확성기에 포탄까지 쏜 뒤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에 참여했던 홍용표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관심사는 오로지 확성기 방송 중단으로, 다른 문제는 거의 꺼내지도 않은 채 확성기에만 집중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은 한국이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는 대가로 목함지뢰 도발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