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는 기존의 성폭력에 대한 폭로와 달리 영향력 있는 여성 오피니언 리더나 셀레브리티(유명 인사)들이 성폭행 가해자를 적시하며 자신의 경험을 폭로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잃을 것도, 지킬 것도 많은 힘 있는 한국의 여성들이 과연 ‘피해자 비난’을 감수하겠느냐는 시각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할리우드 여배우 폭로로 촉발
역설적으로 트럼프가 일등공신
SNS선 강력한 추동 세력 없어도
‘눈송이’를 눈사태로 만들어내
#왜 지금인가=서 검사가 폭로한 사건은 8년 전의 일이다. 이에 대해 검찰에서도 ‘해묵은 이야기’ 논란이 나온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성폭력도 길게는 수십 년이나 묵은 이야기다. 정현미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장은 “이제야 이런 이야기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때가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폭로는 해마다 나온다. 하지만 지난해 초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격렬한 페미니즘 동조 현상이 일어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여성계는 그 일등공신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꼽는다. 성폭력 논란에 휩싸인 대통령과 미국 사회의 보수화가 여성들의 저항을 불렀다는 것이다. 지난해 1월 미국 워싱턴에선 ‘여성들의 행진’이 시작됐고,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의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는 발언이 페미니즘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우버의 사내 성희롱 사건, 폭스TV 간판 앵커 빌 오라일리의 성추행 등 남성 가해자들을 적시하는 폭로가 줄을 이었다. 여기에 여배우들의 실명 폭로로 대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페미니즘의 진화=미투는 현재 세계 페미니즘 운동의 화두이면서도 과거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여성계 전문가나 학자와 같은 추동 세력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여성운동과는 무관한 여배우, 스포츠 스타, 검사가 앞서고, 일반 여성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해시태그를 통해 확산하고 동참한다. 오히려 여성계 전문가들은 미투에 나타난 새로운 양상들에 대해 똑 부러지는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페미니즘의 방법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생각도 달라져서다. 우리나라 여성운동은 여성의 사회·문화적 평등에 몰입하는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이끈다. 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수퍼우먼’ ‘남성 직종의 최초 여성’ ‘전사’가 될 것을 요구한다. 성 상품화를 혐오하며 의식화된 여성성의 학습을 권장한다.
그러나 최근 세계 페미니즘은 ‘모든 개인은 다르며, 각각 다른 개인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개인의 해방을 중시하는 제3세대 페미니즘 계열이 또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고 있다. 개인으로서의 ‘신체의 자유’와 ‘타자의 욕망으로부터의 해방’, 궁극적으로는 ‘의식 속에서의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고, 정치보다는 공감하는 이야기와 국면에 동참한다.
#SNS와 ‘검은 시위’=3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구심점이 없다는 점에서 주류 여성운동가들로부터 금세 녹아버리는 ‘눈송이(snow flake)’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미투가 거대한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SNS가 있다. 해시태그 운동은 ‘정치적 투쟁’이 아닌 ‘공감’의 힘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지난달 열렸던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참석한 여배우들의 검은 드레스 물결은 2~3년 전부터 등장한 여성 시위 방식인 ‘검은 시위’에 동참한 것이다. 폴란드 낙태 금지 입법에 대한 저항운동인 ‘검은 수요일’, 남미 국가들에서 벌어진 여성 살해(femicide)에 대한 저항운동인 #NiUnaMenos(하나도 적지 않다) 해시태그 운동과 ‘검은 시위’ 역시 SNS의 산물이다. ‘검은 옷을 입고 모이자’는 SNS 메시지에 동참한 여성들이 대규모 시위대를 이루면서 ‘검은 옷’은 여성 시위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양선희 선임기자 sunn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