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였던 아버지(故 김무생)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주혁은 배우가 됐다. “뭐든 안으로 삭이는 성격인” 그가 “감정을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연기할 때였다. 그런 그의 필모그래피는 온통, 사랑하는 누군가의 곤경에 발 벗고 나선 속 깊은 남자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여전히 믿기 힘든 부재를 견디며, 그가 스크린에 가장 뚜렷이 남긴 얼굴을 되뇌었다. 최근 침체기에서 좀처럼 헤어 나올 줄 모르는 한국 멜로영화는 이 결이 다른 배우에게 빚진 것이 너무도 많았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결혼 1주년 여행 중 정체불명의 남자 M(박중훈)과 우연히 얽힌 정현(김주혁)은 M의 영문 모를 살기로부터 아내 윤희(추상미)를 지키려고 발버둥 친다. 많은 설명 없이 M의 악마성을 천재지변에 가깝게 그려놓은 영화에서 관객의 주의를 지탱하는 건 M에 대한 정현의 리액션이다. 아내에게 “오직 널 행복하게 만드는 게 내 진심”이라고 대놓고 말할 만큼 낭만적인 애처가였던 그는 제어되지 않는 공포와 분노 속에 서서히 다른 인격으로 변모한다. 엔딩에서 안경을 벗은 정현의 무표정에 겹쳐지는 M의 공허한 살의. 그 극단적인 전개를 김주혁은 다소 거칠되 제법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다.
'세이 예스'
1990~2000년대 멜로·로맨스 장르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남성 주인공들은 상대적인 우위의 입장에서 여성 주인공을 ‘신분 상승’시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자신이 연인 관계에서 완전히 물러남으로써 여성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런 엔딩이 대다수였다. 그런 와중에 김주혁은 전혀 다른 노선을 걸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연인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그 욕망을 자신의 것 이상으로 성취하려 애썼다. 계속해서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으면서.
'청연'
'홍반장'
‘홍반장’에서 넉살 좋게 동네 대소사를 챙기던 홍두식은, 좋아하는 치과의사 혜진(엄정화)이 일이 잘 풀려 서울로 돌아간다고 하자 정작 잡을 엄두를 못 낸다. 이 여자, 힘들다고 찾아와서 술 먹고 싶다면 어쩌나, 혜진이 좋아하던 와인으로 속절없이 벽장만 채우면서 말이다(실속 차리는 데는 영 ‘젬병’인 이 ‘오지라퍼’ 캐릭터는 지난해 김주혁이 노총각 셰프로 분한 로맨스영화 ‘좋아해줘’에서 다시금 짠하고도 코믹하게 변주됐다).
홍상수 감독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영수는 여자 친구 민정(이유영)이 다른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다닌다는 친구들의 말에 민정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하지만, 종국에는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을 믿겠다”며 민정의 품에 안긴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랑하는 민정을 있는 그대로의 그 자신으로 받아들이겠노라 맹세하면서(이 영화로 이유영과 그는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뷰티 인사이드’에서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남자 우진이 지쳐가던 연인 이수(한효주)를 위해 안녕을 고하는 이별 신. 우진 역에 캐스팅된 스물한 명의 주요 남자 배우 중 김주혁을 하필 이 장면에 출연시킨 건 그럼에도 영원히 이수를 잊지 않을 우진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방자전'
'좋아해줘'
사랑을 배반할 줄 모르는 ‘현실 연인’.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견고하게 다져 온 김주혁 특유의 캐릭터를 ‘이래도?’라고 반문하듯 잔혹한 시험에 들게 했던 인상적인 멜로영화로 동명 소설 원작의 현대극 ‘아내가 결혼했다’와 『춘향전』을 크게 비튼 사극 ‘방자전’이 있었다. 두 작품에서 모두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딴 남자와도 관계를 맺는 연인과 갈등과 번민 끝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 젖힌다. 이렇게나 극단적인 치정극이 대중영화로서 납득될 수 있었던 건 두말할 필요 없이 김주혁이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사회의 상식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극 중 남자들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상식을 뛰어넘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 심란하고도 지리멸렬한 심리 변화를 탄력 있게 드러내는 김주혁의 내면 연기는 고스란히 관객들을 극에 빠져들게 하는 징검다리가 됐다. 대체 불가능한 배우란 수식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비밀은 없다'
'공조'
이와이 슌지 감독의 4부작 옴니버스 ‘장옥의 편지’ 등 단편영화로 새로운 도전을 하며 김주혁은 그렇게 더 넓어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 근사해질 그를 예감했다. 황망한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최근 인터뷰마다 “연기가 부쩍 재밌어졌다”고 했던 김주혁. 너무 빨리 떠난 그가 못다 보여준 모습들을 아쉬워하기엔 이 기나긴 겨울밤도 짧기만 하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