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이훈범의 시시각각] 성한 것 상한 것

중앙일보

입력 2017.10.18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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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은 유모가 필요한 것 같네요.” 소피스트 철학자 트라시마코스가 코웃음을 쳤다. 소크라테스는 막 “의사가 자신 아닌 환자에게 유익한 처방을 내놓듯 치자는 자신이 아니라 피치자에게 유익한 통치를 한다”고 주장한 참이었다. 갸우뚱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시마코스가 대답한다. “당신이 코 흘리는 것도 모르고 떠드는 철부지 같아서요. 양치기가 양떼를 위해 양을 살찌우나요?”
 
플라톤이 『국가』에서 들려주는 얘긴데, 서른 살짜리가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이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 한다고 비웃는 것이다. 결국 털을 깎고 고기를 팔아 양치기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양떼를 돌보는 게 아니냔 말이다. 이처럼 트라시마코스에게 “정의는 곧 강자의 이익”일 뿐이다. 지배자란 자기 이익에 맞도록 법을 정해 놓고 피치자가 지키면 상을 주고 어기면 벌을 준다는 거다.

상한 것은 이참에 확실한 분리수거를
수는 적어도 싱싱하면 유권자 몰릴 것

트라시마코스의 논리는 통렬하다. 현실적이어서 더욱 그렇다. 기원전 5세기 얘긴데도 여전히 솔깃하게 들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다를 게 없다. “정의롭지만 무질서한 사회와 정의롭지 않지만 질서 있는 사회 중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헨리 키신저의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우리는 이 말들이 궤변임을 안다. 양을 사랑하지 않고 주머니만 생각하는 양치기의 나라는 고기 무게를 속여 팔아도 아무 말 못하는 참주국(僭主國)일 뿐이며, 키신저의 나라는 불의한 권력으로 질서가 강요된 독재국가일 따름이다.
 
이들 논리에 맞서 소크라테스가 철인(哲人) 군주가 지배하는 이상국가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게 『국가』의 내용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장황하고 따분하다. 비약도 있고 때론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왜 아테네 사람들의 미움을 사 독배를 마시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하다. 옳은 소리는 듣기 싫은 법이다. 오늘날에도 그렇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게 낫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전쟁에 이기기 위한 불의라도 말이다.” 이건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2500년이 지나도록 달라지지 않은 논쟁을 굳이 꺼낸 이유는 눈앞에서 그런 일이 또 벌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도 장황하게 한 것은 어차피 설득되지 않을 주장을 구차하게 길게 펼치기보다 그저 보여주고 싶어서다. 바른정당의 ‘자강-통합’ 논쟁 말이다. 명분과 실리의 싸움이라지만 여기서 실리는 양치기의 이익이다. 보수가 분열해서는 진보에 맞설 수 없다는 게 통합파의 논리라는데, 그렇다고 박차고 나올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과 합쳐도 좋다고 어느 보수 유권자가 허락했는지 숱한 질문을 받았을 터다.
 
결국 의원 자신들을 위한 통합인데 자기 살길 찾기 바쁜 이들에게 정의와 명분을 얘기해봐야 설득이 될 리 없다. 이참에 갈라서는 게 낫다. 어차피 지난번 1차 탈당 때 여론 눈치 보며 주저앉았던 이들이다. 그때 제대로 못했던 분리수거를 차제에 확실하게 하는 게 좋다. 성한 것을 상한 것과 함께 두면 성한 것마저 상하기 십상이다. 상한 것 골라내고 남는 게 별로 없어도 괜찮다. 소비자들이 대형마트를 찾는 건 물건이 많아서가 아니라 싱싱해서다. 대형마트에 상한 것만 쌓여 있다면 소비자들은 싱싱한 물건이 있는 집 앞 가게로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러면 물건 수도 많아지는 게 이치고 순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유권자들이 원하는 건 수가 아니라 싱싱함이다. 정의와 명분이란 말이다. 역사가 트라시마코스보다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더 기억하는 게 그 증거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