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코폴라(46) 감독을 지금껏 어떻게 기억했든 상관없다. 이제 어느 누가 그를 ‘미국 최고 영화 명문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데뷔해, 예쁜 화면과 감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으로 과대평가된 감독’이라 깎아내릴 수 있을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차지한 여섯 번째 장편 연출작 ‘매혹당한 사람들’을 보면 그가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한 뛰어난 감독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혹당한 사람들'
-원작 소설도 있고, 이를 바탕으로 돈 시겔 감독이 1971년에 만든 동명 영화도 있다. 어디서 영감을 받은 건가.
“내 친구이자 ‘매혹당한 사람들’ ‘블링 링’ ‘썸웨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미술감독으로 함께 일한 앤 로스가 돈 시겔 감독의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영화를 봤는데 이상하게 이야기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리메이크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못 한 채로 원작 소설을 찾아 읽었다. ‘이 이야기를 여자들의 관점에서 다시 쓴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원작의 재해석인 셈이다.”
-남북 전쟁 시기, 미국 남동부의 버지니아주라는 원작의 배경을 바꿀 생각을 하지는 않았나.
“주변에서 그런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난 원작의 배경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당시 여성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 들어맞는 역할을 강요받았다. 늘 밝고 명랑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유지하며, 정성을 다해 남성을 대접해야 하는 식이었다. 그 시대 예법 중에는 ‘여성은 칭찬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항목도 있었다. 여성의 콧대가 너무 높아지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그렇게 살아가던 여성들의 삶에, 전쟁으로 남자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자기 삶을 자기 힘으로 지켜 나가야만 하는 상황을 당시 여성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점을 탐구하는 게 몹시 흥미로웠다.”
'매혹당한 사람들'
-전쟁의 긴장 속에 여자들끼리만 살아가는 신학교에 부상당한 군인이 머물게 된다. 이 영화의 뱃속에는 등장인물의 욕망이 요동치는 위험천만한 드라마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미저리’(1990, 로브 라이너 감독)를 떠올렸다. 소설가 폴(제임스 칸)이 애니(케시 베이츠)의 집에 온 손님이자 인질이 되지 않나. 그런 스릴러는 한마디로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그래서 ‘매혹당한 사람들’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할 때 일부러 평소의 나보다 한발 더 나아가려 했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분위기와, 욕망과 위험이 도사린 이야기를 조화시킨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무척 즐거웠다. 왜냐하면 전에 이런 걸 해 본 적이 없으니까(웃음)!”
-약간 빛바랜 듯한 영상이 정말 아름답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어느 멋진 순간’(2006),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2013)로 유명한 필립 르 소드 촬영감독이 필름으로 찍었다고.
“필립은 말 그대로 예술가다. 요즘은 빈티지 렌즈로 촬영하는 사람이 정말 드물지 않나(이 영화는 KODAK VISION3 500T 5219 카메라에 Kodak 35㎜ 필름으로 촬영했다). 우리는 이 영화가 깨끗하게 빨아 널어놓은 순면의 천 뒤로 아른거리듯 부드럽고 아련하게 보이길 바랐다. 동시에 그 천에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과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게 하고 싶었다. 등장인물들이 성적인 욕망을 애써 누르며 답답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혹당한 사람들'
-당신의 영화는 여성 주인공의 심리를 섬세하게 비춘다. 특히 ‘처녀 자살 소동’, ‘블링 링’에 이어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다시 한 번 여성 집단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원작 소설이 여성으로만 이뤄진 집단에 대해 그리고 있다는 점에 끌렸다. 여자들이 모인 집단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재미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다. 남자들의 관계가 단순하고 명료해서 이해하기 쉬운 것과는 다르다. 이 영화의 여성들이 전쟁 중이라 신학교 건물에만 숨어 살 듯한다는 점은, ‘처녀 자살 소동’에서 좀체 이웃과 어울리지 않는 리스본 가족의 다섯 자매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이 모인 집단을 그린 건 이 영화가 처음이다. 나이가 다르다는 건, 각자의 삶에서 다른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아닌가. 그런 인물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을지, 그들의 보금자리에 느닷없이 등장한 남자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그려 보고 싶었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