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
―특별전을 위해 부천을 찾았다.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팬들과 함께 직접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꿈만 같다. 무엇보다 내 영화를 계속 기다려주는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새로운 나라, 낯선 장소에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하나.
“밥 먹는 걸 제일 먼저 한다. 한국 음식을 워낙 좋아해서 맛있게 먹었다(웃음). 사실 도시를 구경하고 싶지만, 일정상 많은 걸 할 수가 없어서 아쉽다. 아직 서울을 가보지 못했는데, 꼭 가보고 싶다.”
―영화를 볼 때마다 오프닝 크레디트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솔 바스가 디자인한 ‘현기증’(1958,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타이틀 변형(‘커먼 웰스’(2000)), 여성의 몸과 얼굴(‘마녀 사냥꾼’(2013)), 미생물과 기하학적 무늬(‘더 바’) 등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작업에 공을 많이 들일 것 같은데.
“정확히 짚었다.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내 영화에서 오프닝 크레디트는 단순히 배우와 스태프 이름이 나오는 화면이 아니다. 관객에게 영화의 힌트를 주는 또 하나의 예고편이다.”
“의도가 있거나 의식적으로 어떤 공간을 만들진 않는다. 그래서 의미라기보다 그저 스토리텔링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 같다. 공간은 캐릭터에게 한계점을 주고, 그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요소다. 이야기와 캐릭터를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공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나 부조리한 일들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 장르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비범하면서 독특한 캐릭터들이다. 영화에 딱 맞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방법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캐릭터를 먼저 설정하고, 그에 맞는 이야기를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다. 이야기를 다 완성하고 나서 그에 맞는 캐릭터를 만든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이야기와 시퀀스다. 캐릭터들은 감정을 나타내는 도구이자, 이야기에 따라 운명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물론 내 영화에 그들은 꽤 자유롭게 보일 거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정해진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내 영화의 캐릭터들은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 우리 역시 자유롭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어떠한 한계 이상을 넘어서진 못하잖나.”
―하나의 장르에 집중하기보다 호러, 코미디, 멜로, 스릴러 등 여러 장르를 섞어 원초적인 재미를 준다.
“내 영화를 보통 음식에 비유하는데, 많은 장르를 한 접시에 담으려 하다 보니, 맛이 조금 뒤엉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치킨과 소고기, 야채와 소스 등 여러 음식을 섞어서 죽을 만드는 게 아니라 조금씩 깔끔하게 담아낸다. 관객들에게 짠맛과 단맛, 필요할 때마다 맛이 바뀌는 걸 선사하고 싶다. 어떤 건 따뜻하게, 또 차갑게 나오는 음식을 골고루 섭취했으면 좋겠고, 먹는 분들이 유니크한 맛을 느껴주길 바란다.”
―아홉 작품이나 함께한 호르헤 게리카에체베리아 작가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나.
“사실 호르헤와 함께 하는 작업은 내 자신과 소통하는, 혼잣말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8살 때부터 알던 사이고, 계속해서 함께 작업을 하다 보니 정말 잘 맞는다. 호르헤는 나보다 논리적이고, 나는 그보다 조금 더 미친 편이다. 그는 영화의 장점을 생각하고, 나는 임팩트를 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죽이지 않기 위해 그가 필요하고, 그는 영화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필요하다. 우리 둘의 밸런스가 잘 맞지 않나.”
“테렐레 파베즈는 훌륭하고 환상적인 배우다. 그는 모든 캐릭터에 삶을 불어넣는다. 감독이 배우에게 원하는 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연기하는 거다. 테렐레 파베즈는 단역으로 나올 때에도 그 인물의 감정을 조각조각 이어붙이고 사랑, 연민, 증오를 섞어서 삶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연기할 때 마블 캐릭터같이 파워풀하다. 그래서 가끔 토르와 헐크를 섞은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웃음).”
―초창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감독 특유의 펄펄 끓는 에너지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나에게 느껴지는 에너지란 아마도 삶에 대한 열정,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 그리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일 거다. 나는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마치 마법의 묘약을 마신 것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내 삶이 영화고, 그 영화가 나에게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고 할까. 그래서 24시간이 에너지로 가득하다.”
―24시간 영화만 생각하나.
"영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한다. ‘이제 그만 생각해야지’ 할 여지도 없을 정도다. 영화를 만드는 건 내게 삶과 싸우는 것, 동시에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나의 다른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예전엔 내 삶에서 도망치려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오랫동안 작업을 하다 보니 이젠 영화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 같다. 어제도 계속 대본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차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나.
"사실 잘 모르겠다. 예전엔 하나를 구상하고 완성한 다음, 또 다른 걸 구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네 다섯 작품을 한꺼번에 구상하고 그 중에 하나를 완성하는 것 같다. 여러 개를 구상해야 하나가 완성된다고 할까. 아직 확정된 것이 없어서 지금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를 몇 개 해주겠다. 먼저 사람 좋은 살인마 이야기다. 또 하나는 오랜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한 남자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 그리고 TV 공포 시리즈도 구상 중이다.”
―들려준 이야기 중에 하나가 영화로 나오면 반가울 것 같다.
“세 가지 중에 완성된 작품이 나오길 나도 바란다. 기대해 달라.”
아시아 최초! BIFAN에서만 공개한 이글레시아 감독 영화 3
‘칵테일 살인마’(1991)
잠 못 들게 하는 영화1-‘아기의 방’(2006)
‘야수의 후예’(2016, 디에고 로페스, 다비드 피사로 감독)
이지영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