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실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중앙일보

입력 2016.01.18 01:17

수정 2016.01.18 01:43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이영희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

생각 없이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초반부터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애니메이션 ‘스누피:더 피너츠 무비’의 도입부, 늘 그렇듯 연날리기에 실패하고 낙담한 찰리 브라운에게 ‘담요소년’ 라이너스가 다가와 이렇게 말할 때다. “찰리 브라운, 또 실패했구나. 하지만 잊지 마. 중요한 건 그래도 계속 해 보는 용기야.” 어릴 적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어깨동무 찰리 브라운’을 즐겨 봤지만 재밌다고 느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중년이 다 되어 만난 동글동글 소년 찰리 브라운이 이렇게 마음을 울릴 줄이야. 애니메이션 개봉과 함께 쏟아져 나온 관련 책들을 훑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이 만화가 애초 어린이를 겨냥한 작품이 아니었다는 사실.

 원작은 1950년부터 무려 50년간 신문에 연재된 찰스 슐츠(1922~2000)의 네 컷 만화 ‘피너츠(Peanuts)’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피너츠 완전판』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저자는 “누군가 10대 딸이 내 만화를 좋아한다고 할 때 가장 짜증이 난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른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불운의 아이콘이자 매사 용기가 없는 소년 찰리 브라운이 전학 온 빨간 머리 소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애니메이션의 줄거리. 하지만 이 에피소드 역시 성인이 되어 겪은 좌절의 경험에서 나왔다. 첫 연재가 결정된 날 슐츠는 의기양양하게 좋아했던 여성에게 청혼을 했지만 거절당한다. “그 여인이 내 청혼을 거절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 그 순간에, 틀림없이 찰리 브라운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을 것이다. 패배자들은 일찍 출발하는 법이니까.”(『찰리 브라운과 함께한 내 인생』)

 다시 보니 꽤 시니컬하다. 짝사랑에 빠진 찰리 브라운은 “저 아이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대출은? 모기지는 어떡하지?” 고민한다. 아이들은 조용하고 부모들만 웃는다. 원작 만화에는 “사람은 외출하고, 강아지는 집 지키고, 사는 게 그런 것” “인생이라는 책에는 뒷면에 정답이 없어” 등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문장이 가득하다. 걱정과 조바심이 많았다는 저자는 귀여운 캐릭터들의 입을 빌려 실패와 늘 마주해야 하는 어른들에게 쓸쓸함 섞인 위로를 건넨다.


 정작 자신은 더없이 성실해 1만7897편의 만화를 어시스턴트 없이 매일 홀로 그렸다고 한다. 때론 만화가 뭐 이리 어렵냐 비난도 받았지만 찰리 브라운의 아버지답게 좌절하지 않았다. “행복한 상태에는 재미있는 요소가 전혀 없다. 유머는 슬픔으로부터 나온다.”

이영희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