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시론] 강건종합군관학교의 비극을 멈추려면

중앙일보

입력 2015.05.20 00:13

수정 2015.05.20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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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지난달 15일 평양에서 열린 ‘국가급’ 만찬. 김일성 주석 출생 103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싸늘했다. 권력 실세인 최용해 노동당 비서와 황병서 총정치국장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김정은 동지를 목숨으로 옹호 보위하자”는 취지의 연설 외에는 침묵이 흘렀다. 예년과 다른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는 게 해외 참석 인사의 전언이다. 수십 년간 북한 권력 핵심에 자리해 온 베테랑 간부들의 동물적 감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보름 뒤 잔혹한 피의 숙청이 펼쳐졌다.

 국가정보원이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처형을 공개한 지 1주일이 지났다. 한기범 1차장이 13일 국회 정보위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달 30일께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에서 대공화기인 고사총으로 비밀리에 숙청이 진행됐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대한 불만 표출과 태공(怠工·일을 게을리함) 등이 주된 이유라고 한다. 김정은이 주재하는 회의 중에 졸거나 말대꾸한 괘씸죄도 한몫했다는 얘기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를 마친 ‘검증된 첩보’란 점에서 현영철 숙청은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대북 감청 등 한·미 정보당국의 대북 감시망과 휴민트(humint·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가 조합된 결과란 설명이다. 일각에선 현영철의 모습이 북한 TV 영상물에 여전히 나온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기록영상 삭제 여부가 처형 판단의 절대기준은 아니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현영철을 지우면 숙청을 안팎에 알리는 셈이 되는 데다 국정원의 대북 정보 역량을 평양 당국이 앞장서 확인시켜 주는 모양새가 된다는 측면에서다.

 집권 4년 차인 김정은이 이처럼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선택한 배경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27세의 나이에 최고지도자에 올라 60~70대가 주축인 노동당과 군부의 간부들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위기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제왕학을 마스터하지 못했다. 겉으로 순종하면서도 딴마음을 먹는 면종복배(面從腹背)를 감지했을 수 있다. 카리스마나 리더십 부족도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2년 전 고모부인 장성택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것도 그 몸부림이란 얘기다.


 김정일 시대에도 숙청은 있었다. 권력을 물려받은 지 4년째 서관희 농업담당 비서를 간첩죄로 공개 처형했다. 아사자 속출로 민심이 들끓자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졸음을 이유로 계급장을 떼거나 처형하지는 않았다.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회의 때 수시로 하품을 해도 원로 예우 차원에서 그냥 넘겼다. 어느 겨울 노동당사에서 잠들어 버린 간부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덮어주었다는 얘기는 ‘위대한 영도자’의 관용과 배려를 부각하는 혁명일화로 선전된다.

 평양의 파워 엘리트들은 지금 꽁꽁 얼어붙었다. 김정은 등장 후 밝혀진 숙청 사례만 70명에 이른다는 게 국정원의 설명이다. ‘졸면 죽는다’며 노 간부들은 처진 눈꺼풀을 추켜올려야 한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북한식의 ‘적자생존’을 위해 김정은의 교시를 깨알처럼 수첩에 메모한다. 김정은식 공포정치가 언제 자기에게 불벼락을 내릴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후계 권력을 다지는 막바지 극약처방이거나 불안정한 시작을 알리는 서곡일 수 있다”(차두현 통일연구원 연구위원)는 진단도 나온다.

 김정은 권력의 숙청 드라마는 우리에게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물론 야전 출신으로 늦깎이 출세한 현영철의 처형을 권력의 불안정과 연관시키는 건 과도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잇따른 숙청의 의미를 해석하고 대비책을 세우는 건 필요하다. 공포정치의 약발이 떨어지면 엘리트의 불만과 반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김정일 정권 초기 벌어진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사태가 재연되지 말란 법도 없다.

 남북관계에 미칠 파장도 꼼꼼히 짚어야 한다. 숙청의 피바람은 당국 대화나 교류·경협 같은 비둘기파의 목소리를 모조리 빨아들였을 게 분명하다. 강성의 군부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분쟁의 불씨를 다시 지필 기세다. 노동당 대남전략가들은 현영철 처형에 대한 우리 국민 비판여론을 ‘최고 존엄 훼손’으로 몰며 보복을 위협하고 있다.

 유엔 등 국제사회와의 공조망도 촘촘히 짜야 한다. 장성택 처형을 계기로 높아진 북한 인권 개선 목소리는 현영철 사태로 동력이 커졌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소까지 거론되는 등 김정은에게 부메랑이 될 기세다. 최고지도자를 겨냥한 압박에 북한은 위축되는 모습을 보여 왔다는 점에서 숙청에 제동을 걸 방안이 될 수 있다.

 처형 장소로 지목된 강건종합군관학교는 우리 육사에 해당하는 초급 보병지휘관 양성소다. 6·25 전쟁 때 지뢰를 밟아 전사한 총참모장 강건(姜建·본명 강신태)의 이름을 땄다. 엘리트 청년장교를 키워내는 이곳이 무자비한 살육장으로 시선을 끌게 된 건 비정상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강조해 온 ‘세계화’의 관문이라 할 평양 순안공항 코앞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란 점에서 더 그렇다. 강건의 비극은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