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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22) 김우중과 나 <6> 대우 부도 막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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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98년 가을, 시장은 눈에 띄게 대우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해 11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수행한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왼쪽)이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린 한·중 경제인 오찬 연설회에서 두통을 느끼는 듯 미간을 만지고 있다. 이틀 뒤인 15일 오후, 김 회장은 긴급 수술을 받았다. 두개골과 대뇌 사이에 출혈이 생기는 만성경막하 혈종이 발견된 것이다. [중앙포토]

1998년 10월 29일. 노무라 증권사는 한 편의 보고서를 시장에 내놓는다.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Alarm bells ringing for the Daewoo Group)’. 내용은 이랬다. ‘…대우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워크아웃(Workout·기업 재무구조 개선작업)에 들어갈 수도 있다.’ 이례적이었다. 노무라는 그때까지 공개 보고서를 낸 적이 없었다. 묘한 시기에 터져 나온 보고서, 파괴력은 컸다. 보고서 이후 시장과 정치권이 ‘대우 워크아웃’이란 단어를 조심스럽지만 공공연히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대우에 돈을 빌려준 채권단들이 본격적으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한 달 전인 98년 9월, 금융감독위원회가 파악한 대우의 채무는 47조7000억원에 달했다. 1년 새 19조원이나 늘었다. 그것도 주로 회사채나 기업어음(CP)으로 끌어당긴 돈이었다. 이미 은행과 제2금융권에선 대우에 돈을 빌려주지 않고 있었다. 김우중 회장이 내게 “걱정 말라”던 게 4월. 불과 다섯 달 만에 대우는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어떡한다….’ 대우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대우를 살리려면 구조조정을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김우중 회장에게 누차 강조했던 말 그대로였다. “(구조조정 없이)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시장이 외면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너무 세게 조여선 곤란했다. 금융회사들이 회수 경쟁에 나서면 시장 전체가 무너진다.

 ‘대우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일단 큰 불은 막고 보자.’ 나는 시장에 개입하기로 했다. 법과 규정을 지켜야 하는 자리, 그러면서도 시장이 부서지도록 놔둘 수는 없는 자리. 금감위원장이란 자리의 이중성을 절감하고 고민할 때였다.

 김정태 주택은행장을 내 방으로 부른 것도 그래서다. 주택은행은 상대적으로 자금 사정이 넉넉했다. 장기 주택자금 위주로 돈을 굴렸으니 애초 부실 우려가 적었다. 대우에도 다른 은행보다 대출이 많이 나가 있었다. 98년 8월에 행장이 된 그는 취임하자마자 대우를 조이기 시작했다. 시장 위험에 민감한 증권맨 출신다웠다. 이 눈치 빠른 은행장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고 대놓고 대우 자금을 회수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에둘러 말했다.

 “전임자가 한 일을 후임자가 깔아뭉개지 마시오.”

 김정태는 “알겠다”며 돌아갔다. 그래 놓고 자금 회수를 멈추지 않았다. 나로서도 더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삼성생명까지 대우 자금 회수에 나섰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우선 급한 불부터 끄자고 생각했다. 98년 12월. 김상훈 당시 은행감독원 부원장보와 정기홍 통합기획실장을 불렀다.

 “지금 대우 때문에 시장이 말이 아니지요.”

 김상훈이 대답했다.

 “네. 사실상 디폴트(채무 불이행) 상태입니다. 투신사들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대우 채권을 던지면 일제히 투매라도 할 분위기입니다.”

 “지금은 시장을 지키기 위한 ‘긴급 피난’적 조치가 필요합니다.”

 나는 ‘긴급 피난’이란 단어에 힘을 줬다. 잠시 침묵…. 정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급 피난적 조치. 대우를 부도내지 말라는 얘기였다. 방법은 하나. 만기가 돌아오는 대우 빚의 기간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관계 금융회사의 협조가 꼭 필요했다. 정기홍은 투신사 사장들을 불러모았고 김상훈은 은행장들을 설득했다. 당장 대우 기업어음부터 연장에 협조하도록 했다. 98년 말부터 시작된 이런 조치는 해를 넘겨 6개월쯤 이어졌다. 99년이 되자 정기홍은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야 했다. 금융회사의 자발적인 협조를 받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자금담당 임원을 불러 “무조건 연장하라”고 일방적으로 요청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무리수는 언젠가 막히는 법. 이듬해인 99년 4월이 되자 한계가 왔다. “더 이상은 곤란하다” “다른 대책을 내야 한다.” 김상훈·정기홍이 어려움을 호소했다.

 돌이켜보면 긴급 피난을 지시했던 그때, 이미 대우는 파국을 맞고 있었던 것 같다. 최대한 소프트 랜딩(soft landing·연착륙)시키려 노력했지만 그것마저 너무 어렵고 복잡했다.

등장인물

▶김정태(65)

증권맨 출신으로 한신증권 부사장, 동원증권 사장을 지낸 뒤 98년 한국주택은행장에 취임한다. 이후 2001년 국민·주택은행이 합병하며 국민은행장으로 3년간 일했다.

▶김상훈(70)

한국은행에 입사해 98년 은행감독원 부원장보, 99년 금감원 부원장을 맡는다. 정기홍 실장과 함께 대우 채권 회수를 막았다. 국민은행장을 지내고 현재 한국CFO협회장을 맡고 있다.

▶정기홍(67)

한국은행 출신. 나는 금감위 출범에 맞춰 그를 통합기획 실장에 임명했다. 금감원 부원장을 거쳐 2004년부터 서울보증보험 사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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