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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21) 김우중과 나 <5> “대우는 걱정 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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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83년 9월 1일 뉴욕발 서울행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영공에서 격추됐다. 본래 이 비행기를 타려 했던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은 하루 일찍 귀국하자는 이헌재의 주장 덕분에 사고 비행기 탑승을 피했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나는 운명론자다. 그 단어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1983년의 항공기 격추 사건도 그중 하나다. 그해 9월 1일 뉴욕에서 서울로 들어오던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요격을 받고 격추됐다. 200여 명의 탑승자 모두 숨졌다. 나와 김우중 회장이 탈 뻔했던 비행기였다.

 김 회장 부부는 8월 말 미국 콜로라도주 볼더에서 열린 ‘세계지도자회의’에 초청받았다. 대우 경영에 대해 김 회장이 강의했다. 그의 영어는 한마디로 엉터리다. 그래도 의사 전달은 정확하다. 볼더에서 귀국 일정을 놓고 잠깐 실랑이를 벌였다. 김 회장은 “뉴욕 지사에 들렀다가 9월 1일 새벽에 들어가자”고 했고, 김 회장의 부인 정희자 여사와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바로 들어가자”고 우겼다. 말은 안 했지만 8월 31일이 내 결혼기념일이다.

 결국 김 회장이 손을 들어 8월 31일 새벽에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고 문제의 격추 사건이 난 것이다. 서울에서 소식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그 비행기를 탔다면….’ 바로 회장실로 가서 의기양양하게 큰소리로 말했다.

 “뉴욕에 들렀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내심 “그때 당신 말 듣길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정색하며 역정을 내는 게 아닌가.

 “그때 바로 오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었네. 내가 그 비행기만 탔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자기가 그 비행기에 탔다면 기장이 자신과 얘기를 하려고 자동항법장치에 맞춰놓고 비행기를 운행했을 거란 주장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타지 않자 기장이 조금 빨리 가려고 원래 항로를 벗어나 사할린을 가로지르다 그런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그런 발상을 하다니….’ 김 회장의 발상은 그렇게 엉뚱한 데가 있었다.

 대우를 떠난 건 85년 2월 말이다. 나중에 한국신용평가가 되는 기업금융정보센터 사장으로 거취를 옮기면서다. 국내 최초의 신용평가회사였다. 사장을 맡아달라는 김만제 재무부 장관의 요청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2월 초, 사표를 내자 김 회장은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대우에 더 몸을 담기 난처한 상황이기도 했다. 퇴사 전 1년 정도 경북 구미의 대우반도체(옛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대표를 맡았다. 인수 가격을 놓고 1년간 정부와 줄다리기를 했던 회사다. 김 회장은 “인수 가격을 좀 더 깎아보라”고 주문했다. 그게 잘 안 돼 나를 도와줬던 김정덕 당시 소장이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냈다. 나도 그의 퇴사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꼈다. 게다가 대우 안에서 내 위상도 애매하다고 여길 때였다. 어쨌든 굴러온 돌, 기존 임원들이 날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회사를 떠나고 나니 김 회장과의 만남이 자연 뜸해졌다. ‘세계 경영’ 으로 그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몇 년에 한번 형식적으로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내가 다시 본격적으로 그를 만난 건, 금융감독위원장이 된 직후였다.

 98년 4월 초. 서울 남산의 힐튼호텔 펜트하우스. 김우중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나는 서근우 제3심의관과 함께였다. 그는 여전했다. 당당하고, 여유가 넘쳤다.

 “대우는 걱정하지 말게. 일부러 대우를 조이지만 않으면 돼.”

 그는 비교적 여유 있어 보였다.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모든 게 ‘유동성의 위기’일 뿐”이라고 거듭 말했다.

 “다 돈줄이 막혀서 이러네. 숨통을 조금만 틔워주면 수출이 될 거야. 수출로 외자를 벌어오면 유동성이 해결되지. 걱정할 거 없어.”

 나와는 문제 인식이 달랐다. 내가 보는 문제의 핵심은 ‘신뢰의 위기’였다. 정부가 신뢰를 상실해 시장에서 돈이 빠져나간 것이다. 오죽하면 나토(NATO·No Action Talk Only·행동 없이 말만 한다는 뜻) 정부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대기업과 금융회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회장님. 이번 위기는 간단치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하셔야 합니다. 시장에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걱정 말래도. 일부러 대우를 조이지만 말게.”

 “정부가 지원할 방법도 없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약속 때문에 손발이 다 묶여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나는 일어섰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확인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우중 회장이라면 어떻게든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시장의 반응 역시 비슷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대우 같은 큰 기업이 쉽게 망하겠느냐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98년 10월 29일, 시장을 뒤흔들었던 그 노무라 증권의 보고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등장인물

▶정희자(72)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다 84년 힐튼호텔을 경영하는 ‘동우개발’의 회장으로 취임, 그룹 경영에 참여한다. 미국 유학 중 사망한 장남 고(故) 김선재의 이름을 따 91년 ‘선재아트센터’를 설립, 지금까지 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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