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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민족분단을 막기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1948년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南北)지도자연석회의와 김구(金九).김일성(金日成).
김규식(金奎植).김두봉(金枓奉)등 남북정치지도자들의 회담이 소련측의 주도면밀한 각본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관계기사 8面〉 이같은 사실들은 中央日報가 창간 30주년사업으로 추진중인 현대사 자료발굴과정에서 단독 입수한 소군정(蘇軍政)정치사령관과 민정사령관을 겸임했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레베데프 소장(少將.92년5월 모스크바에서 90세로 사망)의 일기 형식 비망록(대학노트 크기 1백97쪽)에서 밝혀진 것이다. 지금까지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측의 의도와 역할,蘇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문건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비망록에는 북조선 인민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김두봉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규식등 이른바「4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에게『헌법은 채택하지만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두 정치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게 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김두봉은 4월25일 밤 레베데프 소장에게『김규식을 5월10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도록 하자』고 건의,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그를 북한에 묶어 두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비망록에는 소군정이 소련군 극동(極東)사령부 정치위원이자 스탈린의 북한문제 전권대사격인 스티코프 대장(大將)의 재가를 받아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겠다고 발표하고 연석회의에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불러 들여▲남한의 총선 반대와 분쇄▲유엔 한국(韓國)임시위원회 조선(朝鮮)에서 추방▲소.미군 철수▲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남북총선거는 외국군 철수후 실시 등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위한 4가지 지침을 관철토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위해 소군정은「혁명논리와 투쟁전략」을 주 내용으로 연석회의 참석자들의 결의문에 해당하는「조선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사전에 작성해 남한대표들에게도 이같은 지침을 미리 시달하여지침 내용대로 연설을 준비토록 지도하라고 했다.
소군정은 또 북한 정부 수립 두달전 김일성이 수상과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을 겸임하고 박헌영(朴憲永)은 외무상만 맡도록 하는등 초대 수상과 내각,최고 인민회의 상임의장단 등에 대한 후보명단을 작성해 모스크바「중앙」(소련공산당 중앙 위원회 또는스탈린을 지칭)에 상신했으나「중앙」이 남한인사들이 소외됐다고 지적,김일성은 수상만 맡고 박헌영은 제1부수상겸 외무상,남로당(南勞黨)의 이승엽(李承燁)을 사법상,조선인민공화당 당수 김원봉(金元鳳)을 검열상으로 각각 추가 시키라고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군정은 이밖에 남북 정치협상의 와중에서도 인공기와 인민군기를 속히 제작하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지금까지 남북연석회의와 북한정부 수립등을 소군정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을 해왔을 뿐 이를 증명할만한 소련측의 사료가 없었으며 특히 이들 과정 모두를 김일성이주도했었다는 북한 당국과 한국의 일부 주장을 정면으로 뒤엎게 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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