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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대권에 찜찜한 美…CNN "필리핀 친중 행보 가속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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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대통령 후보 마르코스 주니어(왼쪽)와 부통령 후보 사라 두테르테. [EPA=연합뉴스]

필리핀 대통령 후보 마르코스 주니어(왼쪽)와 부통령 후보 사라 두테르테. [EPA=연합뉴스]

36년 전 반정부 시위로 권좌에서 쫓겨난 마르코스-이멜다 부부의 장남 페르디난드 봉봉 로무알데스 마르코스 주니어(64·봉봉) 전 상원의원의 집권이 현실화했다. 사라 두테르테(43·사라) 다바오 시장의 부통령 당선도 확실시된다. 사라는 포퓰리스트이자 ‘필리핀의 트럼프’로 불린 로드리고 두테르테(77) 대통령의 장녀다. 외신은 “필리핀은 두테르테의 철권통치에 이어 권위주의 회귀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현지 ABS-CBN 방송은 9일 오후 9시32분(현지시간 8시32분) 현재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이 1754만표를 얻어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831만표)을 크게 앞선 것으로 비공식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개표율이 53.5%인 상황에서 두 후보 득표 격차가 배가 넘게 벌어진 것이어서, 이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은 7641개 섬으로 이뤄져 당선자가 최종 확정되기까지 수일이 소요될 수 있다고 BBC는 전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독재자 가문의 권토중래

가디언과 CNBC 등은 봉봉이 당선된다면, 이는 독재자 마르코스 일가의 정치적 부활, 필리핀의 민주주의 전환 실패를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날 봉봉이 자신의 어머니 이멜다 마르코스(93·이멜다)와 대형 흰색 밴을 타고 투표장에 등장하자 곳곳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이멜다는 상·하의와 손목시계, 안경 등을 온통 붉은색으로 통일하고, 팔찌·귀걸이·반지·브로치는 굵은 진주로 치장한 모습으로 ‘마르코스 가문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9일 붉은 의상과 진주 악세서리로 화려하게 치장한 이멜다 마르코스(왼쪽에서 두번째)가 투표장에 도착해 차량에서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9일 붉은 의상과 진주 악세서리로 화려하게 치장한 이멜다 마르코스(왼쪽에서 두번째)가 투표장에 도착해 차량에서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멜다는 지난 2018년 부패 혐의로 징역 77년형을 받았지만 현재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다. 과거 대통령 관저에서 쏟아져 나온 ‘3000켤레 구두’와 수많은 골드바, 보석 등은 국민적 공분을 샀고, 이멜다의 이름은 부정부패의 상징이 됐었다. 이제 아들 봉봉이 자신이 나고 자란 말라카냥궁(필리핀 대통령 관저)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

봉봉의 아버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89) 전 대통령은 지난 1965년 취임해 1986년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피플파워 레볼루션)으로 축출될 때까지 21년간 필리핀을 철권통치했다. 선거 조작 의혹 등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자 하와이로 도피해 망명 생활 도중 사망했다. 그는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해 기업·언론을 장악했고, 반체제 인사 수천명을 체포해 고문하는 등 잔혹 행위를 일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 당시 마르코스와 이멜다와 해외로 빼돌린 재산은 국가 외채 규모와 맞먹는 100억 달러(12조7000억원)로 추정된다.

1991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필리핀으로 돌아온 이멜다와 봉봉은 잃어버린 재산과 권력을 차근차근 되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멜다는 “필리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봉봉의 운명”이라고 표현해왔다. 또 1998년 필리핀 데일리 인콰이어러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전기·통신·항공·은행·주류·담배·언론 등 필리핀의 모든 것을 사실상 소유하고 있다”고 당당히 밝혔다. 필리핀 정부가 몰수 조치한 자산을 되찾기 위해 중재 소송도 제기했다.

이멜다 마르코스의 구두. [중앙포토]

이멜다 마르코스의 구두. [중앙포토]

봉봉이 대통령에 취임하면 마르코스 일가의 비리를 조사해온 필리핀 바른정부위원회(PCGG)의 인사권을 쥔다. 반부패 기구인 옴부즈맨·세무서장도 직접 임명하고 업무에 관여할 수 있다. 필리핀의 사업가 라파엘 옹핀은 홍콩 유력 일간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봉봉은 (과거 재산의) 모든 지분을 주장할 것”이라며 “마르코스 일가는 약탈로 쌓은 부에 대한 권리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데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 역시 “봉봉은 집권과 동시에 재산 되찾기 시도에 들어갈 것”이라고 전했다.

CNN “필리핀 대선 승리자는 중국일 수도”

CNN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은 봉봉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현 두테르테 대통령의 친중 행보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했다. 필리핀이 친중국 정책을 펼치면, 남중국해를 무대로 중국과 세력 대력을 펼치고 있는 미국의 ‘대(對)중 해상 포위망’에 구멍이 날 수 있다고 CNN은 전했다.

필리핀은 미국의 전통적인 군사 동맹국이자, 중국과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중이다. 하지만 2016년 두테르테 대통령의 취임 이후 ‘탈미친중(脫美親中)’ 행보를 이어왔다.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중국 선박이 장기간 정박할 때도 미온적 태도를 보여 국내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8년 필리핀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마닐라 마라카낭 궁에서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

2018년 필리핀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마닐라 마라카낭 궁에서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

앞서 봉봉은 대선 출마 후 중국과의 관계를 묻는 언론의 질문에 “중국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싱가포르동남아연구소의 양자리 아루가이 연구원은 “직접 대화는 중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필리핀을 약자의 지위에 놓이게 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봉봉이 집권하더라도 필리핀 내에서 반중정서가 커진 만큼 친중 행보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선거 당일 폭력 사태도 잇따랐다. AFP통신에 따르면 이날 오전 남부 민다나오섬 불루안 자치구역에 설치된 투표소에 괴한들의 들이닥쳐 총격을 가해 현장에서 경비요원 3명이 숨졌고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북부 누에바에시하주에서도 시장 후보 2명의 경비원들이 서로 총을 쏴 5명이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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