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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상] 18세기에는 왜 궁궐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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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MBC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 [사진 MBC]

MBC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 [사진 MBC]

"범을 잡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동궁(정조)은 쉽게 해냈지요…신은 일순 이런 생각이 들었나이다. 저리도 쉽게 범을 잡을 재주가 있다면 용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일부. 동궁 이산이 부대를 이끌고 궁에 나타난 호랑이를 잡자, 이에 대해 좌의정 홍인한은 영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영조와 정조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의도입니다.
정조가 동궁 시절 궁궐에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정조는 도성 안에서 호랑이를 척결하는데 매우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호랑이 사냥을 권장한 조선
조선은 국초부터 호랑이 사냥을 조직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조선의 정예 병력인 갑사(甲士)에서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호랑이 전문 사냥부대를 조직하는가 하면, 지방 수령들에게도 매년 일정량의 호랑이 가죽을 세금 명목으로 납부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착호갑사(440명)와 전국의 각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 선발한 착호인(捉虎人)은 약 1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전국 330여개 군현에서 매년 440~740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호랑이, 표범의 서식 분포'에서 인용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호랑이, 표범의 서식 분포'에서 인용

“수령이 1년에 호랑이 10마리 이상을 잡으면 계급을 더하는데, 도둑을 잡는 것은 논상하는 법이 없습니다”(『성종실록』20년 3월 15일)는 기록은 당시 조선이 얼마나 호랑이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호랑이를 잡다 보니 제아무리 호랑이라도 남아나기 어렵겠지요. 17세기에 접어들면 세금으로 납부해야 할 호랑이 가죽을 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인조 11년(1633년) 전라도 무안현감이던 신즙은 “매년 겨울 석 달 동안 잡은 게 겨우 1~2마리”라고 하소연했을 정도니까요.

무서워하면서도 숭배했던 존재인 호랑이 [Getty Images Bank]

무서워하면서도 숭배했던 존재인 호랑이 [Getty Images Bank]

이때문에 지방 수령들은 시장이나 다른 고장에서 호랑이 가죽을 구입해 정부에 바치기 시작했고, 이 비용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됐습니다. 결국 영조는 “백성을 위해 해를 없애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나, 호랑이를 잡기가 쉽지 않고, 다만 쌀과 베만을 징수하고 있으니 그 해가 도리어 호랑이보다 더 심하다”며 호랑이 가죽을 그만 거두도록 지시합니다.

호랑이 사냥에 적극적이었던 정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46년간 재위한 숙종 시대에 단 한 번도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던 호랑이가 영조 시대에 궁에 출몰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영조 20년(1744년) 1월 9일 "사직의 서쪽 담장 밖에 호랑이 발자국이 낭자했다"거나 영조 27년(1751년) 6월 9일 "호랑이가 경복궁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대표적입니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정조 즉위년(1776년) 9월 20일 창덕궁에 호랑이가 들어온 흔적이 발견됐고 정조 1년(1777년) 9월 19일에는 "호랑이가 궁궐 담당 밖에서 병졸을 물어갔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결국 정조 2년(1778년) 9월 5일엔 궁궐 후원에서 호랑이를 잡기도 했습니다.

MBC 사극 '옷소개 붉은 끝동'에서 궁궐에 나타난 호랑이 [사진 MBC]

MBC 사극 '옷소개 붉은 끝동'에서 궁궐에 나타난 호랑이 [사진 MBC]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호랑이를 잡는 장면은 아마도 이때의 기록을 모티브로 삼았을지도 모릅니다.
정조는 이전 국왕에 비해 호랑이를 잡는데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조 7년(1783년) 훈련대장 구선복이 인왕산 인근에서 사흘동안 호랑이 세 마리를 잡자 "사흘 안에 세마리의 호랑이를 잡은 것은 이전에 별로 듣지 못한 일"이라며 "경의 위엄이 사졸들에게 행해져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사졸들의 능력이 다른 부대보다 나아서 그런 것인가"라며 시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훈련도감을 격려하면서도 경쟁 관계인 다른 부대, 즉 어영청과 금위영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뉘앙스를 전달한 것이죠.

 MBC 사극 '옷소개 붉은 끝동'에서 궁궐에 나타난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 [사진 MBC]

MBC 사극 '옷소개 붉은 끝동'에서 궁궐에 나타난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 [사진 MBC]

그래서일까요. 다음 달에는 어영청이 혜화문 밖에서 표범을 세 마리 잡고, 금위영이 호랑이 2마리를 잡아 바칩니다.
그러자 정조는 "이전의 수치를 씻을만하니 경을 위해 매우 다행스럽다. 다시 더 잡아서 바친다면 금위영의 공이 으뜸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역시 경쟁과 분발을 촉구합니다.
또 정조는 영의정 김상철과 논의해 도성 주변에 숲이 울창한 곳은 나무를 베어내도록 지시하는 등 근본적인 호랑이 박멸을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농업과 소빙기가 호랑이를 벼랑에 몰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왜 호랑이가 도성과 궁궐에 침범하는 일이 잦아지게 됐을까요.
최근 생태학계에서는 벼랑 끝에 몰린 호랑이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백두대간수목원 호랑이

백두대간수목원 호랑이

농업 국가인 조선은 일찍부터 농지 개간을 장려했습니다. 건국 직전인 고려말 79만8000결이었던 경작지 면적이 세종 때는 171만결로 2배 급증했을 정도입니다. 호랑이가 많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안도만 해도 태종 때 경작 면적이 6648결에 불과했는데 17세기엔 15만결이 됐을 정도로 폭발적인 개간이 진행됐습니다. 초목이 무성하고 물가가 가까운 낮은 구릉지대에 즐겨 살았던 호랑이로서는 거주 공간이 침범당하는 일이었죠.
여기에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의 인구 팽창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게 됩니다. 도시나 마을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산에서 화전을 일궜는데, 이런 과정은 필연적으로 호랑이의 활동 공간을 더욱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돌은 17세기 소빙기 이후 한반도 남부까지 확산됐으며 막대한 산림이 사라졌다. [중앙포토]

온돌은 17세기 소빙기 이후 한반도 남부까지 확산됐으며 막대한 산림이 사라졌다. [중앙포토]

또하나 결정적인 변수는 기후였습니다.
17세기부터 유럽과 아시아 등 북반구에는 소빙기가 몰아쳤는데, 날씨가 추워지자 한반도에는 온돌이 남부까지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온돌 보급이 확산되면서 땔감 수요도 급증했고, 이것은 대대적인 숲의 벌목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산이 사라지자 형편이 어려워진 호랑이의 상황을 일본 학자 우에다 마코토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계곡의 숲이 잘려져 나갔다…멧돼지가 좋아하는 도토리가 없다. 벌레를 먹는 새들의 모습도 적어 새알을 노리는 동물들도 모여들지 않는다. 그래서 호랑이의 음식은 현저히 적어졌다. 호랑이는 산등성이로 내몰려 굶주린 채로 마을의 가축을 습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온돌 시스템 활용 [중앙포토]

한국의 온돌 시스템 활용 [중앙포토]

이와 별개로 경비가 삼엄한 조선 궁궐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 것은 조선의 건축 특성에서 찾기도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 등과 달리 조선의 궁궐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이 계곡과 이어지는 등 자연친화적 입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같은 환경이 호랑이가 머물고 이동하기에 매우 좋았다는 것이죠.

중국도 상황은 비슷 
한편 호랑이가 사라지는 현상은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세기 들어 무역과 산업의 발전이 맞물리며 더욱 가속화했습니다.
1571년 스페인은 필리핀 마닐라에 거점을 정하고 볼리비아 등에서 채굴한 은을 이용해 중국에서 비단이나 도자기 등을 대량으로 구입했습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세계화 과정입니다.
여기서 막대한 은을 벌어들인 중국은 이런 자본을 이용해 대규모 농지 개발에 나서기도 했고, 상인들은 곳곳에 호화로운 대규모 저택을 세우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모두 급속도로 숲을 사라지게 만든 요인이 됐습니다.

클로비스기의 이동과 북아메리카 대형동물의 멸종

클로비스기의 이동과 북아메리카 대형동물의 멸종

인간의 번영과 동물의 생존이 서로 상충하게 되는 일은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1만3000년 전 아시아에서 북아메리카로 인간이 건너간 뒤 대형 포유동물들이 멸종했다는 이른바 '클로비스기의 대학살' 같은 사건이 대표적으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또 흔히 '친환경'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농업이야말로 동물들의 생활 공간을 위축시키고 멸종에 기여한 산업입니다.

최근 코로나19 등 각종 전염병의 창궐을 인간의 지나친 파괴나 침범에 대한 자연의 반격으로 해석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인류와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는 있습니다만, 개발도상국에서는 개발을 늦추기 어려운 형편이고, 세계 인구가 여전히 팽창을 거듭하는 상황이다 보니 해답을 간단히 구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 기사는 김남신·차진열·이승은·임치홍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호랑이, 늑대, 표범의 서식분포」, 홍형순 「환경사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궁궐에 범과 표범의 출몰」, 우에다 마코토 「호랑이가 말하는 중국사」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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