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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서가 즉 김일성 장군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작년 3월부터 9월까지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졸고 진위 김일성 열전에서 필자는 예부터 전해오던 장장 항일투쟁의 거장「김일성 장군」전설은 가공의 전설이 아니라 분명한 실재인물이었고 항일투사 김광서에 관한 이야기였다 함을 밝혀둔 바가 있다.
김광서는 1887년생으로 1911년에 일본육사(제23기) 기병과를 졸업하고 동경기병 제1연대에서 장교로 있다가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투쟁에 나섰던 사람이다. 김광서는 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을 데리고 남만의 유하현 호산자로 가서 신흥학교에서 독립군양성의 군사교육을 담당하다가 1920년의 3월1일을 기해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키 위한 무기조달차 1919년 초겨울에 노령으로 갔다.
노령에 발을 들여놓은 김광서는 그곳의 동포사회가 시베리아 출병중인 일본군대에 의해 비참한 지경에 놓여져 있는 사실에 부닥쳤다. 그는 한인청년들을 규합하여 일군과의 처절한 전투를 개시했던 것이다. 김광서는 신흥학교에 있을 때부터 김경천이란 변명을 썼는데 노령에 들어가서부터는 김일성이란 또 하나의 변명을 썼다.
이상은 연재 때도 밝혀둔 것인데 이번에 우연히도 김광서 즉 김일성 장군이란 것을 더 확실히 입증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므로 독자를 위해 여기에 이를 설명해 두고자한다. 필자는 지난봄에 「자유당 통치의 특성」이란 논문을 쓰기 위해 자유당 때의 장관 몇 분을 찾아다닌 일이 있다. 국방장관을 지낸 김정렬씨로부터 가장 자상하고도 유익한 증언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다.
면담 끝에 필자는 김정렬씨의 부친 김준원씨가 김광서의 일본육사 3년 후배로서 생전에 김광서가 김일성 장군이란 것읕 말했던 일이 있은 것에 대해 물어봤었다.
김정렬씨는 자기 부친이 김광서가 바로 김일성 장군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 그의 부친이 일군중위로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던 일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준원은 일본 향천현 선통사에 있는 제11사단 제43연대 소속이었다. 1920년에 시베리아에 가서 있는 동안에 독립군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우는 김일성 장군이란 사람이 김광서임을 확인했다는 것이 김정렬씨가 그의 부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새 증언을 분석하기 위해 일본참모본부의 극비문서인 시베리아 출병사를 샅샅이 뒤져봤다. 그랬더니 김정렬씨 증언의 역사적 배경이 명백해졌는데 제11사단은 1920년9월29일부터 10월5일 사이에 ?문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여 1922년6월초에 철수할 때까지 시베리아 극동철도의 니콜스크를 중심으로 한 남부 연선에서 작전했었다. 이 지역은 김광서가 활약했던 「이만」과는 좀 떨어진 곳이다.
그러나 제11사단은 「이만」에 특무기관을 설치하고 있었으며 김준원의 제43연대는 사단직할이었다. 김준원이 자기 선배인 김광서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더우기 김준원이 시베리아에 있었던 시기는 바로 김광서의 무장활동이 가장 치열했던 때일 뿐 아니라 도시 시베리아에 있는 한인무장 항일부대로서는 김광서부대가 유일한 최강부대(6백∼1천명)였던 때이기도 하다. 이때 김준원은 김광서가 김일성 장군으로 활약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훗날 김정렬씨에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이 새 사실은 필자가 이번에 단행본으로 펴낸 「김일성 열전」에서는 자상하게 설명되어있다. 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미처 쓰지 못한 부분을 모두 이 책에 포함시켰다.
김일성 장군(김광서)은 시베리아에서도 활약하면서도 끝내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 오로지 민족독립을 위해서만 투쟁했던 사람이란 것은 연재 때도 밝힌 대로다.
그는 1925년 여름을 고비로 한인의 독립운동을 금지하는 노령을 떠나 만주의 길림성 오지로 이동하여 부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후 생사불명이 되고 말았다. 살아있었으면 올해 88세가 된다. 산 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고혼이 되었을 항일투사 고 김일성 장군의 명복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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