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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제자=김홍일-단천출신 의병장 김일성 장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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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상에서 한·일 양측의 많은 증인들로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항일투사의 이름이 1910년대부터 널리 알려져 왔음을 확인했다. 한인들 사이에는 「김일성 장군」으로, 그리고 일인들 사이에는 「김일성」 또는 「김일성 부대」로 알려져 왔었다. 필자는 「김일성 장군」이 함남단천 출신이라느니, 또는 일본육사출신이라느니 하는 두 가지 전설이 있음에 각별히 유의했다. 그래서 우선 단천 출신 노인들에게로 조사의 범위를 압축해봤다.

<본명 김창희, 부는 군수>
단천출신 10여명의 노인들로부터 들은 증언은 대체로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었다. 함남 단천군 수하면 황곡리에 김두천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구한말에 함북 온성군수를 지낸 사람이다. 그의 둘째아들이 김창희인데 1907년. 일제에 의한 한국군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적 의병투쟁이 벌어졌을 때 김창희는 18∼19세의 나이로(그러니까 올해 85세쯤 된다) 의병장이 되어 일제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다. 이 김일성과 같은 수하면 출신인 서춘식씨(79세)는 『김창희는 어릴 때부터 기골이 범상치 않아 군사놀이를 즐겼고 제 손으로 만든 총으로 새나 꿩을 백발백중 맞혔다.
10여세 넘어서부터는 뜀박질을 하면 마치 나는 듯하여 모두 비장이라 불렀다. 나는 그를 직접 보았다. 김일성은 의병 때 부하들을 거느리고 처음에는 단천 오봉산에 근거지를 두고 왜경과 싸우다가 나중에는 험악한 검덕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는 단천·삼수·갑산 등지에서 싸우다가 만주 쪽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오봉산은 검덕산의 한줄기인데 이 산악지대가 바로 마천령산맥의 지령으로서 단천풍산·갑산성진 등의 군계를 이루는 고산지대이다.
그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백두산에 닿는다. 김일성 부대는 이 고산지대 중 단천쪽에 가까운 제일 높은 봉우리인 검덕산에 근거지를 두고 그 주변일대를 유격하면서 왜경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는 1910년대에는 그냥 김일성, 또는 김일성 부대로 통했으나 3·1운동 후부터는 김일성 장군이라 불렸다.
함국형씨(69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 단천에 오도감이란 부자가 있었다. 나는 조부한테서 오도감과 서로 의논하여 김일성 부대에 군자금을 내던 이야기를 3·1운동 전전해에 들었는데 그것이 내가 김일성 이야기를 들은 처음기회였다. 3·1운동 후에는 국경지대에서 활약한다는 김일성 장군이야기는 아주 자주 들려왔었다.』
김일성의 밀령으로 단천군일대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한사람은 방주익과 박승혁이다. 이들은 자립회란 것을 만들어 특별회원 연5원, 보통회원1원, 그 외는 50전씩 냈는데 회원이 무려 6백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백두산 쪽으로 옮긴 후 한동안 김일성의 소식은 뜸하다가 3·l운동 후부터 다시 그의 활발한 움직임이 국경지대로부터 들려 왔는데, 그 무렵부터는 김일성 장군으로 이름났었다. 단천경찰서에 오래 근무했던 주승렬씨(74세)는 증언했다.

<3·1운동 후 "장군"으로>
『내가 순사로 채용되어 제일 처음 맡은 것이 유치장 간수일이었다. 근무한지 한달쯤 된 1922년 음8월14일 저녁(취직했던 해의 추석전날이어서 언제까지나 기억이 생생하다 했다)에 몇 사람의 독립군이 잡혀와서 수감된 일이 있었다. 일인상사로부터 이자들은 10몇년짜리 징역 감이니 단단히 간수하라고 주의를 받았다.
당시 서장 「원도」는 일본에 출장중이고 경무주임 「상도」가 서장대리를 보고있었다. 그때 그 독립군중의 한사람이 전부터 익히 들어오던 김일성 장군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때 35세 가량이었다. 김일성 장군이 잡혀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곡리의 그의 집에서 어떤 할머니가 사식을 가져왔길래 내가 넣어주었다. 당시는 감방 안에 변소가 없어서 경찰서안의 변소를 쓰던 때다.
김 장군이 변소에 가겠다해서 내놓았더니 그냥 탈출하고 말았다. 중대한 책임문제인데 서장이 없을 때인지라 김일성 장군 탈출건은 일체 없었던 일로 하고 입밖에 내지 않기로 하고 말았다. 함께 붙잡혔던 박승혁 등은 형을 받았다. 김 장군이 탈출한 후에도 여러해 동안 그의 출출정보는 끊임없이 있었다.』
백두산으로 오르는 도중에 장군봉이란 곳이 있다. 그 산록이나 혹은 장군봉의 암굴 속에「김일성 장군」이 근거지를 두고 있다는 소문은 옛날 국경지대에서는 상식으로 되어있었다고 일인등산가로서 백두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렸던 반산달웅씨(70세·동경거주)는 증언했다.
단천출신 김일성 장군 얘기는 그곳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인근지방일대의 사람들로부터도 들을 수가 있었다. 동아일보편집국장 김성한씨는 함남 풍산 출신인데 그는 그의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은 단천의 황곡리 출신 항일애국투사로서 김일성의 부친은 구한말의 온성군수였던 사람이란 것을 들었다고 한다.
덕소의 신앙촌에 유동섭(80세)이란 노파가 살고있다.
『내 남편의 외오촌조카 김창희가 김일성이었는데 황곡리 사람으로서 나보다 몇 살 위였다. 옛날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김두천은 온성군수로 있을 때 첩을 살해한 일이 있어서 1년반 징역을 산 일이 있다. 그 집안은 동학장이(천도교도)여서 모두들 손가락질을 했다』고 증언했다.
대한제국관원 이력서철 김씨 난을 보면 김두천이 나온다. 이상 증언들의 확실성은 김두천에 관한 증언이 기록에 있는 그의 경력과 일치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증인도 김일성 장군의 사망연도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사람들은 1930대 후반의 만주의 공비대장 김일성(제6사장과 제2방면군장) 을 김일성 장군인줄 착각하고 있었다.

<1930년 전후 사망>
해방 후 평양에 「김일성」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단천과 그 일대지방에서는「김일성 장군」이 살아서 돌아온 줄 알고 떠들썩한 일이 있다. 김일성 장군과 외사촌간인 설린은 「모스크바」공산대학 출신으로서 정치대학(건국대학전신)사무장으로 있다가 6·2때 계획적인 납치를 당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평양에 왔다는 소위 「김일성 장군」이 김창희, 즉 김일성 장군인줄 알고 평양까지 가서 면회를 신청한일이 있다. 그가 붙잡혀서 곤욕을 당한 것은 물론이다. 간신히 석방되어 월남했다가 6·25때 또 붙잡혀간 것이다.
김일성 장군의 무용담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 쓸 수 없다. 그에 관한 기록으론 애국향지회편「한국독립운동사」(1956년 발행)에 『김일성은 1888년 단천에서 출생했으며. 1907년에 기의하여 백두산을 중심으로 항일 활동하여 10년을 계속하다가 1926년에 전몰하다』라고 씌어져있다.
이 간단한 기록 역시 편자들의 전문을 토대로 한 것이었겠으나 김일성 장군의 소부대유격활동은 아무리 오래 잡아도 1930년을 넘지는 못했다고 보아진다.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가 발표한 55명의 인민위원 명단 중에 「김일성」이란 이름이 끼여 있었다.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사람은 이제는 이 세상엔 아무도 없다. 【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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