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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제자=김홍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야부 토벌대의 총공격에 쫓겨 1940년12월에 입소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사진이 입수됨으로써 분명히 그는 북한의 김성주가 아닌 딴 사람이란 것이 판명되었으나 그의 신원에 대한 좀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싶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구주의 대촌이란 곳에 토벌대 사령관이었던 야부창덕(중장으로 퇴역)이란 사람이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1970) 그는 82세의 노인이었으나 아주 정정하며 기억도 굉장히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는「토벌작전」때의 일을 회상하면서『김일성 부대는 여러 개의 분대로 나누어 행동하면서 저마다 김일성 부대라 칭해 이쪽에도 저쪽에도 김일성 부대가 있는 것 같은 위장전술을 잘 썼다. 또 김일성이란 사람 본인은 하나겠지만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는 자는 몇이 더 있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이가 어떤 인물인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위장전술로 신출귀몰>
지금은 그 신원에 대해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는데 그의 처 김혜순이도 붙잡혔고 또 박득범이란 사람, 그리고 전광(오성륜)이란 사람 등이 모두 한인으로서 붙잡혔으므로 남한이든 북한이든 어디에 살고있지 않겠는가. 그들은 김일성을 잘 알 것이다. 김혜순은 아주 또릿또릿한 여자였다. 군에서는 이 여자를 시켜 김일성을 사로잡으려 했는데 성사치 못한 일이 있다. 북부 밑에서 최일선 공작을 담당했던 장도공작대라는 것이 있었다. 모든 정보는 거기서 올라왔으므로 그를 만나면 유익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중요간부들의 사살·체포·투항 등이 대개 이 공작대의 업적이었다. 김혜순도 이 공작대에 붙잡혔다. 장도는 헌병조장이었으나 그 탁월한 수완 때문에 장교가 맡아야할 공작대장을 맡았고, 토벌작전이 끝난 후 그 공로 때문에 장교로 특진까지 했다는 것이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사방에 수소문 한 결과 그의 이름이 장도옥차랑이라 함은 확인됐으나 혹은 죽었다는 소문, 혹은 소련으로 끌려간 채 소식이 없다는 소문 등으로 종적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러 곳에 부탁을 해 놓고 일단 귀국했다. 6개월이 지난 1971년2월에 그가 생존해있다는 소식과 주소가 전해져왔다.
일본의 신석에서 배를 타고 동해 쪽을 한참 가면 좌도도에 닿는다. 그 섬 한가운데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중턱에 자리잡은 한촌에서 장도는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필자가 북부로부터 입수한 안경 낀 김일성의 사진을 내 보이니 바로 자기가 입수해서 본부에 보낸 그 사진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이「토벌」하던 김일성이 그 사진의 김일성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자기에게도 김일성과 그의 처 김혜순 등 여대원들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있었는데 4,5년 전에 동경의 무슨 조선문화연구회라는데 있다는 유광수란 청년이 찾아와서 지금 당신처럼 여러 가지를 나한테 알아보러 왔다가 그 사진을 빌어달라고 해서가지고 갔다. 사진은 복사하고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여태까지 안보내주고 있다』고 한다. 이 유광수란 자는 본 연재 38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총련의 행동대원이다. 북한에서 역사를 날조하는데 요긴한 자료를 수집하려 필자보다 몇 해 앞서서 일본을 한바퀴 돈 자이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자료는 없애 버린다.

<소로 탈출, 적군 사관교에>
장도는 유란 사람이 사진 대신에 보내주었다는 책 3권을 내보인다.
김성주의 전기였다. 장도옥차랑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인적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야부 부대에서 특수공작을 맡게 되었는데 김일성 부대란 것이 있다기에 알아본즉 이 부대의 작전이 아주 묘했다. 김일성 부대가 여기에 나타났다 해서 그쪽을 쫓아가면 이번에는 또 저쪽에 나타났다한다.
마치 김일성 부대가 신출귀몰하는 것 같았는데 실인즉 한 부대가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이쪽 저쪽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부대를 여러 개로 쪼개서 이쪽 저쪽에 나타나게 하면서 그 소부대들에게 모두 김일성 부대라고 하게 했던 것이다.
한번은 김일성 부대의 본거지를 점령한 일이 있었다. 산속 깊은 곳에 밀영을 만들어놓고 거기가 본부였는데 우리가 쳐들어가기 조금 전에 그들은 눈치채고 이미 도주하여 빈집이었다.
그때 거기서 그들의 학습용 서적 몇 권과 사진 몇 장을 입수했다. 북부의 사진첩에서 나온 김일성의 사진도 내가 상부에 보낸 그것이다. 체포 또는 투항한 김일성 부대의 대원들을 통해 이 안경 낀 사람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김일성의 처 김혜순도 내가 체포했는데 아주 얌전하고 온순한 여자였으며 한동안 우리 집에 대 마누라하고 같이 있었다. 내 마누라하고 아주 친해져서 빨래도 같이하고 일도 같이하며 살았다. 한번은 이 김혜순을 시켜 김일성의 귀순공작을 해봤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였는지 성사치를 못 했다.김일성은 간도의 용정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간도폭동사건(1930년5월30일)에 뛰어들어 체포되었는데 유치장에서 탈주해 소련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적군사관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만주에 파견되어 동북 항일연군의 제2방면군장이 되었다. 김혜순을 비롯한 모든 대원들의 증언이 그렇게 일치했었다.』
필자는 이 장도옥차랑의 증언을 들으면서 5·30간도폭동사건 때 용정의 대성중학교학생으로서 폭동의 앞장에 섰던 김일성이란 청년이 있었음을 연상했다(본 연재 8회 참조). 김일성은 체포되어 일제의 총영사관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해서 소련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장도의 증언은 계속 되었다. 『나와 김일성과의 연분은 기연이라 할 수 있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간도폭동사건 때에 학교이름은 잊었지만 용정의 어느 중학교학생으로서 잡혔다가 소련으로 도주했던 그 사람이란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었다. 그 자라면 실은 내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관동군에 가기 전에 조선군 나남사단에서 헌병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29년 늦가을에 회령혜병분유대로 전근했다. 다음해 5월에 유명한 간도폭동사건이 일어났다. 상부의 명령으로 용정에 사건진상을 알아보러 갔었다. 총영사관에 가서 여러 가지 알아보았더니 무슨 중학교 학생인 김일성이란 청년이 그 사건에 크게 활약했다가 잡혔는데 소련으로 탈출해 갔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저 그런 일도 있었구나 했는데 나중에 야부 부대에서 토벌공작을 맡았더니 그 김일성하고 맞부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일 수사관 집 식모, 김일성 처>
필자는 장도에게 간도폭동사건 때 소련으로 탈출한 사람은 대성중학교의 김일성이란 청년이었으며 김일성이란 이름은 기록에 없다고 말을 걸었다. 장도는『기록에 김일성이라 되어있다면 그게 맞겠다. 나의 착각이겠다. 바로 그자가 소련으로부터 파견되어온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관동군의 문서에는 그 기록이 있을 터인데 패전 때 소련군이 다가져갔으니 지금은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토벌작전이 끝나고 나는 공로가 많다해서 장교가 되어 북지에 전근했다가 패전 때 소련군에 잡혔다. l956년에 겨우 송환됐다. 소련에 억류되어 있을 때 공비토벌의 장도 공작대장이란 것을 끝까지 숨기고 지냈다. 발각되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로써 보천보를 습격했던 제6사장 김일성이 죽은 다음 2대를 이어 승명 했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안경 낀(근시) 키 작은 간도폭동사건 때 대성중학교 학생이었던 김일성이었음이 확인됐다. 김성주는 길림에서 육문중학을 다녔으며 간도폭동사건에 관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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