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3)2대 김일성의 정체(상)|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제자=김홍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진천보를 습격했던 동북 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이 죽은 뒤를 이어 그 이름을 승명했던 2대 김일성(연군 제1노군 제2방면군장은 1940년12월에 일만 군경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하고 말았는데 저간의 경위를 잘 설명해주는 기록으로는 동남삼성 치안 숙정 공작개요 등 몇 개의 자료가 일본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에는 이 김일성이 1938년 봄에 소련으로부터 파견돼와서 제2방면군장으로 있다가 다른 고위간부들은 다 죽었거나 체포되었는데 유독 이 사람만 살아서 입소 했다고만 설명하고 있을 뿐 그 정체를 말해주는 자료는 아무데도 없었다.
필자는 많은 고위간부가 투항, 체포되었고 또 김일성의 처 김혜순도 체포된 점으로 미루어 필시 이「토벌작전」에 참가했던 사람을 만나보면 김일성의 신상을 알아낼 수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방면의 산증인들을 찾아 다녔다.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서방 호 변호사이다. 그는 만주국 최고검찰청 사상담당 검사로서 야부 토벌사령부의 동남부 치안연락위원회에 검찰대표로서 참가했던 사람이다. 1970년 여름 동경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방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상에 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입수됐었다. 패전 때 관동군의 문서가 전부 태워졌고 또 남은 것은 소련군이 다가져갔으므로 지금은 찾을 도리가 없으나 관동군 4과에는 비수들의 인적상황에 관한「카드」가 있었다. 김일성은 한인이며 34∼35세 정도(1940년 현재)였다고 하는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대해서는 지금도 기억이 선하다. 일선공작대가 그의 사진을 입수해서 토벌사령부에 보고해왔다. 공비들이 자기네끼리 찍은 사진인데 산채를 수색해서 선전문서들과 함께 입수한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찍은 것인데 그 속에 김일성의 서있는 모습을 투항한 간부들을 통해 확인했다. 키는 5척 4∼5촌 가량의 작은 사람이며 얼굴은 빈약한데다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은 위장용이 아니라 심한 근시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사진을 수십 장을 복사해서 사방에 나누어주어 체포토록 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그 사진을 보면서 이놈만 잡으면 다된다 하고 별렀던 그 얼굴이 되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1946년에 만주에서부터 걸어서 북한을 거쳐 귀국했는데 평양에 들렀더니 거리마다에 지금 북한의 집권자인 김일성의「포스터」가 붙어있었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토벌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는 딴판의 사람인데 놀랐던 것이다. 이래로 나는 북한의 김일성은 가짜 김일성이라고 확신하고있다.』
서방의 이 증언을 듣고 필자는 문제의 사진을 입수할 길을 서방과 더불어 구수 협의했다. 토벌관계 사람으로서 패전 전에 일본으로 돌아갔던 사람이면 혹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 그 방면의 사람을 수소문했다. 명고옥과 대판에서 몇 사람을 만났다. 서방과 같은 증언 이였으니 사진은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야부 토벌사령부의 증가참모로 대항일련군 정보공작책임자였던 북부나웅(당시 중좌)란 사람이 경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북부는 70세를 조금 넘은 사람이었는데 벌써 지난날의 기억이 몽롱해져서 양정우·김일성 등을 주 대상으로 야부 사령관을 도와 일대 토벌작전을 전개했다는 이야기와 양정우는 사살했으나 김일성은 놓치고 말았다는 이야기뿐이고 그 밖의 일에 관해서는 거의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서방의 말로는 김일성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알고 있어야 할 북부가 이 모양이니 필자는 무엇인가 귀중한 것을 붙잡으려다 놓친 것 같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필자는 자꾸 유도질문을 해봤으나 허사였다. 굉장한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요령부득의 대학에 안타까운 마음만 설레이는데 다를 따르려 들어왔던 북부의 부인이 민망한 어조로 자기 주인이 2, 3년 전부터 이렇게 노쇠했다는 이야기와 사진첩과 신문「스크랩」등이 있는데 그것이라도 참고가 되겠는가 한다. 필자는 귀가 번쩍해서 어서 보여달라고 했다. 부인이 꺼내온 것은 바로 동남삼성 치안 숙정 공작 기념사진첩과 관계신문기사의「스크랩」이었다. 북부는 그런 것이 집에 남아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부인의 말로는「토벌작전」이 끝나고 주인이 북지로 전근하게되자 만주에서 가지고 있던 사진첩과 관계기사들을 고향(경도)에 있는 시어머니에게 보내드리기 위해 붙였더니 다행히도 경도는 미군의 폭격을 면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진첩에는 토벌관계 일만측 군요인들 사진과 또 항일연군 측에서 압수한 여러 장면의 그들 사진과 그리고 체포·투항한 간부들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들 사진 속에 드디어 안경을 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이 순간처럼 심장이 뛰는 시간을 필자는 과거에도 앞으로도 경험 못 할 것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을 입수키 위해 일본 안을 좁다고 뛰어다녔던 2개월간의 피로가 가신 듯 없어졌다.
한눈으로 그 사진은 북한의 김성주가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김성주의 경력은 하나 없이 거짓임이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몽롱한 북부도 그 사진을 보더니 이게 바로 토벌의 주대장의 하나였던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이런 사진이 남아 있는가고 부인에게 묻는 것이었다.
귀중한 사진이 입수된 것은 큰 수확이었으나 이 사람의 신원에 대해 좀더 캐내야 할 필요는 여전히 남았다. 북부는 이 사진을 보더니 비로소 생각난 듯 자기 밑에 장도 공작대장이란 정보공작에 특출한 자가 있었는데 그가 그 사진을 입수했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그가 살아있다면 그 이상 알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필자는 이 사진과 김성주의 사진과를 외국의 저명한 사진 감정기관에 보내 동일인인가 아닌가를 감정해달라고 의뢰했다. 회답은 예상대로 딴 사람이란 것이었다.
다시 필자는 이 안경 낀 김일성의 사진을 김성주의 소학교 때 급우였던 조의준 조사준(2회 참조) 또 길림서 김성주가 육문중학을 다닐 때 만났던 최진무(3회 참조), 또 김성주가 남만학원에 다닐 때 만났던 이시찬(5회 참조), 그리고 김성주와 오가자에서 같이 살았던 이선일(9회 참조) 등 제씨에게 보였더니 모두가 김성주가 아니란 대답이었다.
또 다시 필자는 이 사진을 해방 후 평양에서 김성주를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고대아연의 김창순씨와 욋과의사로 김성주를 몇 번 만났던 장기려 박사와 조진석 박사 등에게 보였다. 대답은 똑같이 김성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닐 수밖에 없는 것이 전혀 다른 사람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이 사진을 아주 희미하게 얼굴을 잘 알아보기 어렵게 해서 그들 선전책자 속에 넣어놓고 유격대시절의 김성주라고 거짓주장을 하고 있다. 김성주는 근시가 아니다. 김성주는 키도 크며 코가 낮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근시이며 키가 작고 코가 크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이다.
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은 장도공작대장의 증언에 의해 더욱 자세히 밝혀지게 된다. 그런데 북부가 소장하고 있던 그「앨범」은 필자가 몽땅 복사해 왔는데 그 원본은 북한의 대변자 같은 글을 발표하는 조초전 대학의 젊은 정치학교수 손에 의해 조대사회과학연구소에 기증한다는 명목으로 북부 손에서 떠났는데 이번에 확인해보니 사회과학연구소에 기증되지 않고 행방불명이 됐다. 필시 조총련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