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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사장 김일성의 죽음(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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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의 죽음은 그 시체를 검증했던 만군장교 팔목춘웅씨의 증언과 만군기관지『철심』의 기록으로 확인됐다. 제6사장 김일성의 죽음은 근의 대를 이은 또 하나의 김일성의 정체가 밝혀짐(다음 제6장에서 다룸)에 따라 더욱 확실하다. 보천보를 습격함으로써 국내에 널리 알려졌던 동북항일연군 제1노군 제2군 제6사장 김일성은 분명히 사살된 것이다. 그는 분명 김성주·함남태생·당시 36세·「모스크바」공산대학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김일성의 인적상황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에 공포된 일이 있다. 신문에 발표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사살되었다는 것은 당시 국내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경성일보의 보도내용>
1937년11월18일자에 김일성의 죽음이 보도된 일이 있었다. 이 기사는 사살되었다는 사실보도와 함께 김일성의 정체를 밝히는 군 당국의 담화까지 보도하고 있다. 경성일보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여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고 치안을 위협하던… 지난 13일 만군토벌대는 김일성의 소재를 확인, 이를 공격하여 격전 5시간 끝에 그를 사살하는데 성공하였다…보천보 습격의 장본인이며 녹림의 영웅같이 동변도일대를 설치던 김일성이란 어떤 사나인가. 그의 태생은 혹은 함남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남출신이라고도 했는데 국경경찰관의 조사에 의하면 함남설이 유력하며 그 이상은 판명되지 않은 비적다운 성장과정이다.
김일성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월경, 동변도를 근거로 하여 ○○혁명운동을 일으켜 그의 부친은 그 수령이 되었었다. ○○운동이 대안에 확대함에 따라 적색마가 그들 배후에 나타나 공산사상을 선동했다. 적색에 물들은 김일성은 19세 때에 인민전선의「메카」「모스크바」에 잠입, 재노 10개년, 2개 공산대학에서 공부하고 더욱 적위군에 입대, 반일운동의 실천자가 되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곧 동변도로 돌아와…반만항일군을 일으켜 국경선을 휩쓸고 있었다. 녹림 유일의「인텔리」김일성은 곧이어 도당의 수괴에 앉혀졌으며…금춘에는 함남의 국경 제2선 진천보를 습격하여 이 때문에 국경선을 사수하던 혜산서원 수명이 희생될 정도였다. 부자 2대에 걸쳐 반만항일을 계속했던 김일성은 토벌군에 쫓기어 드디어 36세를 일기로 악몽을 청산, 파란 많은 생애의 막을 닫았다.』

<항렬자 다른 성주-성주>
이 보도는 당시 김일성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활자화된 기록이다. 보도내용에 국경 경찰관들의 조사에 의했다고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시원 등 혜산 사건 수사관들이 피의자들을 통해 확인했던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때는 권창욱(권영벽)·박금철·박녹금 등이 한창 취조를 받고 있던 때였다. 북한에서는 이 김일성의 죽음을 한사코 일제의 조작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김성주가「김일성」이란 이름으로 진천보 습격을 했던 것으로 주장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김성주는 기록에 맞추기 위해 제6사장 김일성의 본명인 김성주를 자기의 본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성주의 형제는 철주·영주, 또 4촌은 영주·원주와 같이 항렬자가 이름 끝자인 주자다. 그러나 제6사장 김일성의 본명(김성주)의 항렬자는 이름 웃자인 성자였다.
이 사실은 안도지방에서 중한 반일회란 비밀조직을 통해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 부대를 지원하고 있던 김일성의 4촌형 김성보의 체포에 관한 극비문서(일본 내무성경보국의 특고월보) 속의 기록에 의해 확인된다. 즉 제6사장 김일성의 형제는 성보, 성주와 같이 성자가 항렬자였던 것이다. 김성주에게는 김성보란 4촌형이 없다. 결국 북한의 김성주는 김일성이 아닌 것이다.
김일성의 죽음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해방 후 만주 통화성 일대의 한인사회에서는 이 죽은 김일성의 추도비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창훈씨(55·서울 숭인동 거주)는 길림성 서난현에서 살다가 해방되어 귀국했다가 1946년 봄에 가사정리를 위해 다시 도만했었다. 그는 만포진·집안을 거쳐 통화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느라고 여관에 2, 3일 묵고 있었다. 만주에 살던 많은 한인들이 혹은 귀국하느라고 혹은 일단 귀국했다가 아주 이사하기 위해 가사 정리차 옛 거주지를 찾느라고 사람들 내왕이 붐빌 때여서 여관마다 만원이었다.

<북괴 최현과는 동명이인>
그때 한인청년들이 모금함을 들고 다니면서『수년 전에 항일투쟁을 하다가 죽은 혁명가 김일성의 추도비를 세우고자 하니 동포들은 모두 한푼씩 희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들 노자를 털어 조금씩 돈을 냈다. 그러면서 모두들 말하기를『죽은 사람만 원통하지, 진짜 김일성은 죽었는데 평양의 김일성은 가짜다』라는 것이었다. 진짜 김일성은 통화성 어디에서 만군 토벌대 때문에 죽었다고들 모두들 말하더라는 것이다. 제6사장 김일성이 사살된 곳은 통화성 무송현 양목정자였던 것이 사실이다.
(진천보를 습격한 제6사장 김일성만 죽은 것이 아니라 이 김일성 부대 못지 않게 활발하게 출몰하여 국내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던 제4사 제1단장 최현도 죽었다.
1938년2월23일자 국내신문보도에 의하면 최현 부대는 만군기병 제1단 제2연과 평북대안 무송현 제2구 참자분주소 동방 5㎞지점에서 교전 끝에 시체 14구와 소총 4자루를 남기고 도주했는데 그 시체 속에는 동변도 일대를 설치던 최현의 시체도 있었음이 확인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최현의 죽음에 관해서는 칙무삼웅저『압록강』에도 기록되어 있다.
1938년7월 현재의 기록인데 최신은 죽고 24∼25세의 청년이 대를 잇고 있다고 적혀 있다. 죽은 최현은 1936∼7년께 보도로는「장년의 조선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북한의 최형은 이 대를 이은 최현일 것으로 보고 있다.
1937년11월에 제6사장 김일성이 사살된 후부터 한동안 김일성 부대의 동향에 관한 정보는 아무데서도 입수되지 않았다.

<승명한 새「김일성」등장>
그러다가 겨울을 지나 1938년 봄에 이르러 갑자기 새로 김일성 부대의 활발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측은 이기간 즉 1937년11월부터 1938년3월까지의 활동상의 공백을 김일성 부대는 호강현마당구의 밀림 속에서 동기군정 학습을 실시했다는 주장으로 메우고 있다. 그리고 김성주가 그 김일성이었으므로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측 주장은 모두 근거 없는 날조이고 실은 사장을 잃은 김일성 부대(제6사)는 죽은 김일성의 이름을 승명한 새로운 김일성이란 이름의 지휘자가 소련으로부터 파견되어 올 때까지 활동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명한 새 김일성이 제6사를 지휘하여 활동에 나서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입만한 것이 1938년 봄이다. 이 사람은 물론 한인이다. 그리고 이 사람도 김성주는 아니다. 이 승명한 새 김일성(본명 김일성)은 후에 편제개편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노군 제2방면군장이 된다.
김성주는 이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의 경력도 자기 것으로 가로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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