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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극 … 요즘 10대의 위험한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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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목에 칼자국을 내고 피 묻은 메스를 핥으며)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죽일까?”

 “(얼굴에 상처를 내고는 머리에 총을 겨누며) 크큭, 이제는 바이바이.”

 지난 10일 자정. 네이버의 한 카페 게시글에 사이코패스 살인범이 학생을 죽이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 올라왔다. 곧바로 다음 상황을 그린 댓글이 달렸다. 첫 글이 올라온 지 5분도 안 돼 약 200개의 댓글이 달리며 살인 과정이 차례로 묘사됐다. 같은 시각 또 다른 카페의 단체 채팅창에선 ‘강간 놀이’가 한창이었다. “네 모습이 내 성욕을 자극했다”는 문장이 올라오자 5초 만에 “매트리스에 눕히고 벨트 버클을 내렸다”는 글이 달렸다. 채팅 참여자는 순식간에 47명으로 늘었다. 구강성교 장면까지 묘사됐다. 한 시간 뒤 ‘스모키’란 회원은 “내일이 중간고사”라며 채팅창을 나갔다.

익명성 보장돼 표현 수위 위험

메시지로 주고받는 일반적인 역극 대화 내용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폭력(왕따), 살인, 동성애, 강간 상황이다. 역극 카페에 올라온 대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실제 대화는 이보다 수위가 높고 표현도 적나라하다.

  이른바 ‘역극’ 놀이가 청소년 사이에 유행하며 성적·폭력적 일탈의 창구가 되고 있다. 역극 대화는 주로 인터넷 카페 댓글이나 단체 채팅방에서 이뤄진다. 16일 기자가 ‘역극’이란 단어로 카페를 검색하니 네이버에선 3520개, 다음엔 351개가 떴다. 가장 큰 규모의 카페 회원 수는 5975명이나 됐다. 회원 상당수는 중·고등학생이다. 역극을 하며 성장한 20대도 일부 있다. 놀이 파트너를 찾는 글은 한 카페당 하루에 최대 150여 개가 올라온다. 카카오톡·틱톡 등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은밀히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고등학생 최모(16·여)양은 “하루 중 수업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한 7~9시간을 역극에 쏟는다”며 “한 번에 보통 5~6개의 역극을 동시에 한다”고 말했다. 아이디 ren*****를 쓰는 또 다른 여고생 김모(17)양은 “기숙사 고등학교에 다녀 주중엔 역극을 못한다”며 “휴대전화를 쓸 수 있는 토요일에 역극을 한 뒤 일요일에 하루 종일 잔다”고 말했다.

 역극 대화의 성적·폭력적 묘사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옥상에서 담배를 피던 학생이 단속을 온 선생님과 성관계를 갖거나, 평소 마음에 담아 둔 동성 남학생을 창고나 체육실로 불러 강간하는 식의 대화가 대부분이다. 유명 만화 주인공이 옥상에서 웃으며 떨어져 숨지는 등 자살 장면도 미화된다. 살인 장면을 자세히 묘사한 글도 많다. 최양은 “역극에선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매력이 있다”며 “(선정·폭력적 묘사는) 친구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역극을 했다는 한 역극 카페 회원(29)은 “역극이 일종의 욕구 불만 해소를 위한 것임을 이해한다”면서도 “요즘 학생들의 표현 수위는 생각보다 심하다. 중·고등학생들이 나보다 성인용품 용어를 더 잘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네이버서만 관련 카페 3520개

 역극 대화 내용이 현실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지난해 5월 천안서북경찰서는 ‘멤버놀이’에서 가상연인 관계이던 중학생 A양(15·여)에게 성적 가혹행위를 한 혐의로 중학생 B양(16·여)을 구속했다. 멤버놀이는 아이돌 그룹 등 연예인을 흉내 내며 가상대화를 나누는 역극과 유사한 놀이다. 서울 풍납중 이현아 상담심리교사는 “학생들은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며 “자살 과정 등을 자주 묘사해 본 학생들은 비슷한 충동을 느꼈을 때 이를 자제할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은어 사용해 적발도 쉽지 않아

 그러나 역극 자체를 제재하긴 힘들다. 포털은 모니터링 활동을 통해 음란 게시물을 삭제할 수 있지만 역극 카페에선 bl(boys love·남성 간 동성애), ‘플에’(성관계 묘사에서 플라토닉과 에로 비율) 등 회원만 아는 은어를 써 적발이 쉽지 않다. 스마트폰을 통한 역극 놀이는 찾아내기도 어렵다. 경찰 관계자는 “스마트폰으로 음란한 대화를 나눈 것 만으로 이를 처벌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이명화(사회심리학) 교수는 “역극은 청소년들이 억압된 감정을 표현하려다 생긴 기형적 현상”이라며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정도가 악화됐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규제도 필요하지만 청소년들이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진·이승호 기자

◆역극= 역할극의 줄임말 . 만화·게임 캐릭터, 유명 연예인 등이 됐다고 가정한 뒤 상상력을 발휘해 대화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놀이다. 교사와 제자 등의 관계로 설정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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